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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에 대한 약사(略史)/박형준

에세이향기 2026. 4. 11. 20:50

변소에 대한 약사(略史)

 

 

 박형준

 

 

  옹기는 뒤뜰 장독대에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허리가 동그란 옹기를 안고 있으면

 어머니를 안고 있는 기분이 든다.

 두툴두툴한 옹기의 촉감이 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지붕이 없는 변소에 앉아

 어두컴컴한 땅 밑에 웅크리고 있는

 옹기의 구멍을 내려다본다.

 옹기는 이 집 내력을 알고 있다.

 태어나서 내가 버려졌다는 느낌으로 울었던 것도

 저 밑을 바라보면서이다.

 파묻은 김칫독처럼 발효하는

 옹기는, 저 움푹움푹 팬

 밑바닥에서 깨어져나가며,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썩는 것은 따뜻하다.

 지붕 없는 설움으로 떠도는 식구들이

 들락거리며 별과 새와 구름을 보았던 곳,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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