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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돌챙이/오미향

에세이향기 2022. 1. 4. 10:09

돌챙이 / 오미향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마을로 들어서자, 암벽 위에 작은 돌집이 보였다. 벼랑 위 깔깔한 소금기를 벗 삼아 삶의 모퉁이를 돌아선 그곳에는 삭정이 같은 무릎을 보듬고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만 불어도 거친 말 한마디만 내 던져도, 금세 기울 것 같은 수평을 아버지는 꼭 붙들고 있었다. 숭숭 구멍 뚫린 관절에 햇볕을 끌어모으고 먼바다를 내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잊었다는 것인지 다 지나간 일이라 모른다는 것인지 그 고갯짓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단물 쓴물 다 빠진 아버지의 빈 가슴에 찾아 든 것은 무엇일까? 보는 이의 마음도 마른 웅덩이처럼 젖어들었다. 말랑하게 가라앉은 가슴이 울컥했다.

아버지가 평생 쌓아 놓은 돌들은 말이 없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거칠고 힘든 석공 일은 당신만 하고자 했다. 대물림은 생각도 하지 말라며 더는 돌을 잡기가 힘들었지만, 아버지는 오늘도 돌집 마당을 서성였다. 조용히 봄볕 드는 양지 녘에 앉아 돌을 바라본다. 어느새 아버지의 얼굴에선 미소가 감돌고 커다란 원석을 어루만지는 손에 힘이 느껴졌다. 꼭 다문 입술이 비장했다. 허공 중에 떠 있던 쇠망치가 주인의 손을 거쳐 낙하했다. 끙 소리와 함께 사과 잘리듯 커다란 돌덩이는 반쪽으로 벌어졌다. 바가지 머리의 소녀가 그 틈 사이를 비집으며, 기억 속 유폐된 추억 주머니를 매달고 걸어 나오며, 아버지 뭐 만들어요?, 우리집은 언제 만들거예요? 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돌하고 얘기를 나눴고 돌을 부수고 깨며 겹겹이 쌓아 올릴 뿐이었다. 애써 만든 조형물이 다음 날은 자취도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아련했다. 자연스러운 모양을 갖출 때까지 아버지는 수없이 반복했다. 지독하게 가난해서 이 일을 택했다는 아버지의 얘기에 비하면 너무나 즐겁게 일을 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돌을 조각하면서도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돌은 ‘우리들’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돌가루가 튄다고 나를 멀찍이 밀어내며 장난스레, 우리 향이한테 무얼 만들어줄까? 물으면, 음, 이따만한 멋진 궁전을 만들어주세요, 라며 두 손을 넓게 벌려 보였다.

땀이 비 오듯 내리는 모습을 보다 보면 어디선가, 밥 먹으멍 헙써.(식사 드시면서 하세요), 점심을 먹으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아버지는 궁전을 지었었나? 울퉁불퉁한 표면에 우락부락한 생김새의 커다란 사람, 돌하르방이 떡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서일까. 우스꽝스러운 그의 코는 반질거리며 납작해져 갔다. 그럼에도 한결같은 미소를 잊지 않는 돌하르방은 자식을 위해 온몸의 윤기가 빠져나가도 헬쭉거리며 웃어 보이는, 자식의 행복만을 기원하는 포근한 아버지였다.

어느새 정수리를 뚫고 나온 새치를 한 가닥 뽑으며, 아버지, 혹시 물팡 만드세요? 물허벅을 부릴 데가 있어요?”, 라고 물었다. 받침대로 쓰일 튼튼한 돌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것이지만 옛것에 대한 향수로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민속박물관에, 마당 너른 집에서 볼 수 있는 물팡은 물허벅을 진 이의 욕망과 간절한 이상향의 징표였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부지런히 올라와선 물허벅을 집 마당에 부려놓으며 쳐다보는 하늘이 그렇게 파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물 한 방울이라도 안 흘리려 고생했던 그 마음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줬다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고 했다.

물을 길어 올리고 관리하는 게 여자의 일이라면 제주 남자는 돌과 함께 살아왔다.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삶이 녹아있는 돌 하나 하나하나가 모여 홑담이 되었다. 아랫돌 괴어 윗돌 받치고 중간 돌 빼서 윗돌 올리며 어깨동무하듯 겹담이 되면서 견고해졌다. 빽빽이 잘 쌓아 올리는 게 최선은 아니었다. 사이사이로 바람구멍을 터줘야 돌들도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나의 삶도 높이 쌓아 올리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을까? 주변을 돌아보며 같이 웃고 울 수 있는 바람길을 만들 생각은 했었는지? 내쉬는 날숨에 상처받은 이가 있었다면 더불어 배려하는 들숨으로 바람구멍을 터야겠다.

아버지는 험한 바다와 돌담의 형식으로 바람을 붙잡고 살아냈다. 시꺼먼 화산불이 핥고 지나가도 섬을 지켜냈다. 송송 뚫린 시간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인 돌담은 숱한 바람들이 돌 틈 사이로 빠져나가며 삶을 이어주고 견고하게 지켜준 자리였다.

시골집 근처 밭마다 테두리를 두른 돌담이 즐비했다. ‘여기는 순이네 집’ ‘철수삼촌의 보금자리’ ‘영희네 우영팟’ ‘작은삼촌의 일터’, 라는 밭담이 아버지의 손에서 빚어졌다. 그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은 바람을 피하고 햇살을 받으며 자양분을 듬뿍 먹고 자라날 수 있었다.

나만의 방식대로 물허벅을 지고 왔다. 구덕에 두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앉히고 두 줄의 긴 끈으로 돌돌 감아 가정이라는 울타리로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날랐다. 물허벅을 어깨 너머로 꺼꾸러지게 해서 순도 높은 물을 항아리에 부어 넣었다. 잠시 물팡에 물허벅을 얹혀 숨을 돌리기도 하면서. 잠시 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반 호흡 사이 생의 교차로는 여러 갈래로 뒤엉키기도 했다. 길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어디쯤에서 사라졌을까.

평생을 걸어도 아직 닿지 못한 길의 끝에 돌하르방이 있다. 두 손에는 끌과 망치를 들고 내게 손짓을 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앞에 커다란 암석이 있더라도 헤치고 걸어오라고. 오월의 기분 좋은 햇살과 살랑거리는 미풍에 알맞게 데워진 돌의 살갗을 만져보라 한다. 돌에 기대어 생각에 잠기며 돌의 향기를 맡아본다. 쓰다듬는 손에선 따뜻한 돌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체취가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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