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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된장/정성화

에세이향기 2022. 2. 12. 10:13
된 장

정 성 화

 

친정어머니는 양손에 든 보따리 때문인지 조금 휘청거리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또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서 딸네 집에 오는 길이다. 어머니의 어깨에 내려앉은 세월을 느끼며 우울해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그제야 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셨다. 신문지에 쌓인 참기름병 하나가 부산 구경이라도 하려는 듯, 보따리 한 쪽으로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얼른 어머니의 보따리를 풀었다. 된장과 오이소박이, 참기름, 그리고 된장에 넣어 삭힌 고추와 무장아찌가 들어있었다. 그 냄새만으로도 나는 어느새 고향 마을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얘,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젊어 한때 고생이라고 하지 않니.”

어머니가 나를 볼 때마다 하는 말이다. 선장인 사위가 집을 떠나 있어도 딸이 상념치 말고 잘 견뎌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속으로 ‘어머니, 저도 이제는 젊은 나이가 아니에요’한다. 누구네집 사위는 나이 오십도 안 되었는데 은행에서 나왔더라, 누구네집 아들은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당하고 집에 들어앉아 있다더라며, 일이 없어 집에서 놀고 있는 가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그 옛날 머리에 돌을 맞아 피가 날 때, 된장을 한 덩이 발라 싸매어 두고나면 신통하게 잘 나았듯이, 어머니는 이런 저런 이야기로 나의 쓸쓸함에 된장을 바르고 계신 것이다.

“옛날에 어머니가 끓인 시래깃국은 참 맛있었는데---.”

 

겨울이면 어머니는 된장을 풀어 시래깃국을 자주 끓이셨다. 늦가을이면 무청을 모아 새

끼줄을 타래를 엮어 외벽에다 죽 걸어두었었다. 무청은 벽에 기대어 방안에서 들려오는 우리 부모님의 살림살이 걱정을 죄다 들었을 것이다. 무청이 그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시래기가 되어갈 때, 어려운 살림에 육 남매를 키워야했던 우리 부모님의 속도 그 시래기처럼 차츰 말라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된장은 유난히 맛이 좋았다. 지나가는 이웃 사람도 된장찌개 냄새가 좋다며 대문을 열고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장독대에 가면 그 집 안주인의 살림 솜씨를 알 수 있다며 어머니는 아침마다 장독을 씻고 장독대를 살피셨다. 논의 벼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라듯, 우리집 간장 된장도 어머니의 독 씻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하루 맛을 더해 갔을 것이다.

 

간장 된장을 담그는 일은 집안일 중에서도 아주 큰 행사였다. 닷새 만에 서는 장을 기다려 좋은 콩을 골라 서너 말씩 사들였다. 가마솥을 걸어놓고 장작불을 대어가며 메주콩을 삶는 날은 온 식구가 거들어야 했다. 쇠절구에 넣고 콩을 찧는 일은 아버지께서, 찧은 공을 나무틀에다 넣고 목침 만한 크기로 메주를 만드는 일은 어머니와 우리가 맡았었다. 대청마루 위에 매달린 메주를 보면서, 이것은 언니 얼굴, 저것은 동생 얼굴 하며 우리 형제들의 얼굴과 짝짓기도 했는데, 자꾸 보고 있으면 정말 메주 위에 어떤 표정이 살아나는 듯 했다.

 

메주는 겨울 내내 우리 방의 아랫목을 차지했다. 담요를 뒤집어쓴 채 아랫목에 웅크리고 있는 꼴이, 곰처럼 미련해 보여서 메주더미에 자주 눈을 흘기곤 했다. 게다가 메주 뜨는 냄새는 얼마나 쿰쿰한지. 메주가 장독 속으로 들어간 뒤에라야 우리 방에도 봄을 청할 수가 있었다.

 

장독대에 서면 어떤 속삭임이 들린다. 뽀글뽀글대는 소리로 들리지만 사실은 그것이 바

로 간장 된장의 언어다. 된장과 간장이, 그리고 고추장과 막장이 서로 촌수를 따져보고 있는 소리이며, 장독대에 입성하기 전 각자 보고들은 세상 얘기를 서로 앞다투어 풀어놓고 있는 소리이다. 때로는 장 속에 들어있는 콩잎이나 고추, 무 덩어리에게 어서 ‘풀기’를 버려야만 맛좋은 장아찌가 될 수 있다며 넌지시 일러주는 소리일 때도 있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어머니가 조용히 말을 이으셨다. 된장을 뜨러 갈 때마다 쇠고기 국을 끓여주지 못하는 그 때의 집안 형편이 원망스러웠다고 밥상에 앉자마자 “또 시래깃국이네”하는 아이들의 소리가 꼭 바늘같더라고.

그랬었구나. 어머니의 아픈 부분이었구나. 그 순간 나는 시래깃국의 뜨끈한 국물이 그리워졌다. 된장의 콩 알갱이가 드문드문 보이는 걸쭉한 시래깃국을 후룩후룩 들이켜고 싶었다. 된장 냄새가 온 몸에 배이도록.

 

친정에서 된장을 갖다먹으면 못 산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친정에서 된장을 가져온다. 고등어 조림할 때도 된장을 한 숟가락 넣어 비린내를 날리고, 갖가지 나물에도 넣어 조물조물 무쳐내며, 된장찌개를 아예 우리 집 식탁의 주전 선수로 발탁해 놓고 있다.

 

독 속에 뛰어든 불순물마저도 제 살로 품어내는 된장의 포용력이 내게도 있다면 좋으련

만. 작은 일에도 성질을 부리는 나를 보고 남편은, 그렇게 된장을 많이 먹고도 아직도 성

질은 ‘소금물에 잠긴 메주’ 수준이라며 일침을 놓는다. 내가 콩 비린내만 겨우 면했다는

말인가. 발효가 더디게 일어날 수도 있다며 변명해 보지만, 이 다음에라도 구수한 장맛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진득한 성격을 지닌 사람을 볼 때면, 나는 속으로 ‘된장 같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천장에 매달려서 기다리고 , 아랫목에 웅크린채로 기다리고, 햇빛이 쨍쨍한 날 갑갑한 독 속에 들어앉아 삭기를 기다리는 된장. 그런 된장을 닮은 사람이라면 경망스럽지 않고 진중하며 속이 깊을 것 같다. 소리 없이 노랗게 익어 가는 된장처럼, 그의 삶도 깊은 맛과 멋으로 푹 익어가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은 점점 된장 항아리를 닮아 가는데, 내속은 아직 떫은 맛 그대로이니 장독 뚜껑을 한동안 꾹 눌러두어야 할 것 같다. 부엌에서 시래깃국 냄새가 퍼져온다. 잘 익은 된장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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