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데도 민망한 / 정재순
아뿔싸, 몸이 춤 트기를 한다. 미스터트롯 열풍으로 방송채널마다 네 박자가 난무하는 바람에 온 집안이 들썩거린다. 어깨와 발바닥이 근질근질거리는가 싶더니 남편 앞에서 춤을 추고 만다. 순전히 익숙해진 탓이다.
설마하니 내가 이럴 줄 몰랐다. 판이 제대로 깔리고 분위기가 딱 들어맞아야 춤이 나왔었다. 하물며 뽕짝이 나오면 귀를 닫아버리던 때가 어저께 같은데……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튼 몸은 부끄러움을 잊은 모양이다. 쿵짜작 쿵짝, 발라드나 힙합이 나와도 찔뚝 없이 장단을 맞춘다. 빙긋이 웃으며 쳐다보던 그가 티브이 화면을 막아선 나를 피해 자리를 옮겨 앉는다.
관계가 돈독해지면 자연스레 마음의 담장을 허문다. 격식과 거추장스런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트기가 시작된다. 춤은 물론이거니와 생리현상에도 점점 거리낌이 없어진다. 세월을 함께 하는 동안 고운 정이 두터워지고 미운 정은 곰삭아, 새로운 달콤 쌉싸름한 정이 생긴 덕분이리라.
연애시절엔 상대가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착각하기 십상이다. 결혼하고 한 공간에 쭉 같이 있다가보면 그 환상이 차차 벗겨진다. 내남없이 그렇고 그런 일상이 아니던가. 신혼 땐 눈치 살피면서 배려하던 여자들도, 임신을 하고 속절없이 터져 나오는 가스 때문에 실수하게 된다. 익숙하고 편안해진 사이라면 자연스럽게 트기가 이루어져야 하거늘, 이 나이 먹도록 아직 쉽지 않은 게 있다. 알몸트기와 방귀트기가 그러하다. 아이가 셋, 볼 것 안볼 것 다 본 사이임에도 어렵다. 언젠가 등을 밀어준다던 그의 손길이 혼자서는 잘 닿지 않는다며 팔뚝과 엉덩이까지 내려왔다. 점점 몸이 마쉐린을 닮아가는 있어 환한 불빛에서는 거북할 따름이다.
동네시장 속옷 파는 가게주인은 이목구비가 남달리 고왔다. 늘 곱게 단장한 아주머니의 엷은 미소는 여성스럽기 그지없었다. 아이들 내복 사러 가면 조곤조곤 말을 붙여와 은연중에 가까이 지냈다. 그 곱상한 분이 터놓는 방귀 낀 이야기에 배를 잡고 웃었다.
맛이 든 무김치랑 저녁을 먹은 부부가 자려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배가 찌릿 아프더니 난데없이 아줌마한테서 소리 없는 방귀가 나와 버렸다. 무엇이건 소리 없는 게 더 위력을 발하는 법, 당황한 그녀는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행여나 냄새가 새어나올까 봐 조바심을 내며 남편이 잠들 때까지 손으로 이불가장자리를 조심조심 눌렀다는 것이다.
어린 내게 오빠는 산처럼 각을 세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눌러보라고 했다. 왜 그러는지 몰랐던 내가 꾹 누르는 동시에 방귀를 뀌었다. 손가락이 바로 방귀버튼이었다. 그런 후부터 엄지를 내밀면 얼른 콧구멍부터 틀어막았다. 내가 버튼을 누르지 않자, 오빠는 엉덩이에 갖다댄 손을 주먹 쥐어. 내 코앞에서 활짝 펴는 얄궂은 장난을 쳤다.
그래서인지 내 방귀만큼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기를 바랐다. 젊은 부부들도 트고 산다는데 말이다. 도무지 소리와 냄새가 민망하여 함부로 방출시키면 신비감이 떨어질 것 같아 지금껏 고수하는지도 모른다. 기미가 느껴지면 화장실에 들어가서 물을 틀거나 요란한 음악을 틀어놓고 컨트롤한다. 숨기고 싶은 건 숨기는 게 훨씬 편한 까닭이다.
나이가 그렇게 만드는 걸까. 중년에 이른 아버지는 방귀소리도 유난했지만 식사를 다 하고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습관처럼 트림을 했다.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아무도 말을 못했으나 식구들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요즘 들어 남편도 가끔 트림을 한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매서운 눈으로 쏘아본다. 내버려두면 저이도 애들 앞에서 무심코 트림을 하지 싶어서다. 내가 양치질 하는 중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와서 소변을 보고 나가기도 한다.
방귀트기를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트기 전엔 엄청 큰일이었는데 트고 나니 별일 아니더란다. 사는 게 뭐 별거냐고 되물었다. 싱겁게 웃고 놀리기도 하면서 서로 편히 지내라고 했다. 예의 신비감이나 이성으로서의 매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끈끈하고 편안한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감정이 느슨해지는 게 영 내키질 않지만 방귀트기는 내 숙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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