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부터의 사색 - 원정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 책을 읽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때 가장 값진 글감이 진실이란 것을 알았고 뼛속까지 정직하고 싶던 때라 더 울림이 컸다. 그러나 실현에 옮기는 일은 얼얼한 감동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그 후로도 좋은 책을 만나면 출렁거렸고, 그리고 40년 동안 은근하고 은밀하게 나를 중독시킨 안방마님 ‘신문’은 그 세계와의 소통에 다리가 되어주었다.
조간신문, 변화무쌍한 나를 매일 붙잡고 있는 절대불변의 공간, 한동안 아이들 뒷바라지로 분주한 풍경 뒤에서도, 이제 각자 무대로 진출해 호젓한 풍경 뒤에서도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주고 있는 친구.
그 잉크 냄새가 커피 향과 섞이면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쾌감으로 뻑뻑했다. 이내 목을 타고 내리는 커피 한 모금에 스미면 첫사랑처럼 술렁거렸다. 그 야릇한 떨림이 쿵쾅대는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들여 ‘아침 신문 읽기’는 다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양보할 수 없는 특권 중의 특권이다.
새벽 3시, 가끔 밤을 새우거나 일찍 잠이 깬 새벽엔 현관에 신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배달원이 던지는 소리가 계절마다 다르다는 누군가의 말이 사실이었다. 겨울엔 두꺼운 신사의 외투처럼 둔탁했다. 봄엔 나풀대는 처녀의 원피스처럼 쌈박했고, 여름엔 잔뜩 소나기를 맞은 소년의 신발처럼 축축했으며, 가을엔 바바리 속 여인의 스카프처럼 고독했다.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공기의 밀도 탓이겠지만 내겐 감성적 이유가 더 크지 않나 싶다.
한때 남편이 먼저 신문을 점령, 매무새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건 참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정리를 잘 해놓아도 필립 들레름의 맥주 첫 모금이 주는 그 황금빛 기쁨은 맛볼 수 없었으므로, 그것이 얼마나 싫은지 남편보다 일찍 알람을 맞췄고, 어쩌다 늦게 깬 날엔 남편이 화장실 간 사이 새치기, 첫눈을 먼저 맞추기도 했다. 그렇다고 자정을 넘기고 이어지는 새벽에 미리 집어오는 경박한 걸음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신문은 현관 밖에서 한두 시간씩 새벽 숨을 고르며 숙성을 거쳐야 할 것 같아서이다. 16절지로 접힌 단정한 자태를 접하면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새색시 옷고름을 앞에 둔 신랑이 그랬을까.
종이로 접하기보다 TV나 컴퓨터로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뉴스만큼은 신문으로 읽어야 제 맛이라는 게 내 개똥철학이다. 내가 보는 일간지는 획기적인 베를리너판으로 디자인 혁명을 일으켰다. 처음엔 갑자기 줄어든 몸피가 낯설었는데 곧바로 적응이 되었다. 전보다 자리를 덜 차지하니 좋고, 시선도 덜 움직이니 좋고, 덩치 큰 과거보다 도회적 세련미가 느낄 수 있어 더 좋았다.
첫 페이지, 그들은 늘 성공한다.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다음 휘몰아 뒷장을 넘기도록 계산된 치밀함. 어떻게 그런 타이틀과 사진을 골라내는지. 그런 헤드라인으로 시선을 장악하는지. 30년간 북 디자인으로 명성을 얻었다는 디자이너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사진가의 절묘한 콜라보레이션이 독보적으로 전달된다.
수필도 제목이 중요하다. 그것을 강조하다보니 구백 냥이라고도 한다. 부실한 간판으로 주목을 못 받거나 미아가 되는 작품들이 많은데, 신문기사는 매번 천 냥짜리. 그날 기사의 성패는 제목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부러울 따름이다.
신문은 늘 나에게 현재를 제공한다. 전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 마크롱 최연소 프랑스 대통령의 당선과 영국 고층 빌딩의 화재, 400명 이상이 사망한 아프리카의 산사태까지. 안방에 앉아 지구촌 곳곳의 기쁨과 슬픔과 안타까움을 지금now 여기서 here 브리핑 받는 셈이다. 아주 철저히 준비를 한 누군가가 내 앞에서 극대화된 자기의 언어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보고 읽으며 갖가지 상념에 빠진다.
코드가 맞는 문체를 가진 칼럼니스트나 기자는 찜해놓고 챙겨 읽는다. 기대처럼 어김없이 쫀득거리고 어느 부분 잘근잘근 씹기도 하고 또 심하다 싶으면 입의 혀처럼 착 달라붙고 어떤 날은 송곳같이 예리함을 내세우는데도 결코 찌를 의도가 없어 보이는 그런 탁월한 필력에 슬그머니 질투가 날 지경이다. 어찌 그렇게 유려하게 잘 풀어내는지 그럴 때마다 나는 유쾌한 심술에 빠지며 사유의 근육을 키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꼼꼼히 챙기는 정치면, 주로 한숨 없이는 읽기가 힘든데도 빼놓지 않고 읽는 것은 작은 관심들이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희망 때문이다.
광고의 배치도 또한 어찌난 절묘한지. 32페이지에 무려 28건. 박스 광고까지 하면 50건을 육박하는데도. 표지 뒷장부터 빼곡한 여성잡지 같이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수필 잡지에서 일해 본 경험으로 주 수입이 광고라는 생리를 알기 때문에 나는 적극적으로 그런 노력에 관대하다. 굳이 경험 없는 일반 독자들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떠도는 말처럼 내 일간지의 기여도가 있었는지 눈에 띄게 광고가 늘었다.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를 똑같은 전면광고로 도배한 것은 용납이 되지만 매일 32페이지나 되는 지면에 수필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광고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노력 한 조각만 떼어내면 사람냄새 풀풀 나는 수필 코너는 일도 아닐 텐데. 그나마 옆 동네는 가끔 게재해주는데 도무지 이 동네는 깜깜하기만 하다.
시는 한 쪽 구석이지만 그래도 그들만의 영토를 갖고 있다. 심플한 삽화 밑에 ‘시가 있는 아침’. 어느 날 쉼보르스키의 「두 번은 없다」를 읽고 그날 달려가 시집을 사기도 했다. 수필이면 어땠을까.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올는지. 수필에 대한 홀대는 서운하다 못해 눈물겹다. 그러니 나를 포함한 모든 수필가들은 이런 모욕적인 상황에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토요일에는 새로 나온 책이 소개된다.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책들의 행진. 보너스를 받는 기분이다. 그런데 하단 책꽂이에 소개된 신간들을 보면 심장이 쪼그라든다. 얼마 전에 『트러스미』란 소설을 낸 후배의 소개가 없는 게 마치 내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도 문운이 있어야 되는 걸까. 언젠가 마법의 빗자루를 타면 내 책도 가능할 모른다는 상상이 가슴과 목을 쭉 늘이게 한다.
아침에 32홀을 돌고나면 따뜻한 차 한 잔을 더 마신다. 마무리로 12코스자리 ‘비지니스’. 거기서 10년째 보유중인 주식의 매도를 매일 갈등하고 마지막 코스 땅을 지키는 십이지신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와 일일이 악수한다. 특히 닭 앞에서 서서 동쪽 방향과 노란색이 길하다는 오늘의 운세를 점지 받으면 모든 운동이 끝난다.
부득이 아침 일정이 바쁠 때, 오후나 저녁 이후에 펼치고 앉은 신문은 아침 같은 찰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신선도도 떨어지고 몰입도도 약해지고 게다가 날아가버린 시큰둥한 잉크 냄새. 어쩐지 원가 대비, 큰 손해를 본 기분이 든다. 그러니 올빼미형 인간인 내가 신문만큼은 아침형 인간일 수밖에 없다.
오늘 밀린 신문은 어떤 수필가의 정의처럼 신문지가 되어 일상에서 다양한 봉사를 하거나 혹은 고스란히 재활용 코너로 향한다.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남기고. 그것은 왔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마치 우리 인생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가 끝없는 윤회를 거듭하듯이. 오랜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인연을 건너고 먼 길을 돌고 돌다보면 언젠가는 또다시 내 곁으로 올지도 모를 일.
내일 또 나는, 오늘처럼 추운 겨울 현관에서 호흡을 가다듬은 하루를, 전 세계의 하루를 어제처럼 만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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