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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행복과 불행 사이 / 허정열

에세이향기 2022. 4. 27. 09:20

행복과 불행 사이 / 허정열

 
 

여름의 길섶은 싱그럽고 풍성하다. 와르르 쏟아진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새끼 제비처럼 주둥이를 벌려 먹이를 받아먹는 것 같은 강물 위로 햇발이 깊숙이 뻗친다. 막 버무려 놓은 상큼한 달래 같은 강물이다. 아름다운 만남이랄까? 양 어깨가 무척 넓고 가슴이 따뜻한 어머니가 우리를 맞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일렁이는 강물이 포옹을 끝내고 시침 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소화불량 걸린 작은 일상들의 체기가 서서히 풀리고 지끈거리던 머리와 지친 마음이 금세 맑아진다. 잃어버린 삶의 의욕이 다시 일어서고 불끈불끈 생각들이 치밀어 오른다. 낯선 통증이다.

누구보다 아픔이 많은 그녀다. 작년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남편마저 혈압으로 쓰러져 7개월간의 병원 생활을 했다. 지금도 통원치료를 하고 있어서 지칠 만도 한데 언제나 아침 강물처럼 그늘이 없다. 작고 여린 체구에 저런 강인함이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녀의 얼굴에서 햇살 같은 미소를 만날 수 있다. 그녀는 항상 그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닥치면 할 수 있어요.”라고. 그녀 앞에 서면 작은 아픔으로 갈등하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몸이 불편한 남편의 손과 발이 되어 챙기는 그녀다. 긴 병원 생활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겪으면서도 크게 투정 한번 들은 적이 없다. 쉽게 건너온 위로의 말들, 인연만큼 두텁게 오고 갔으리라.

아픔은 아픔을 통해서 위로받을 수 있다. 그 상황에 부딪쳐보지 않은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녀는 아픔을 겪으면서 호강스러운 나에게 위로의 전화를 잊지 않았다. 허영과 사치 같은 생각들을 접어서 수도 없이 강물에 내다 버렸기 때문일까? 강물이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상큼하다. 그녀의 구겨진 생각과 험한 일상들이 이 강줄기를 따라 질펀하게 젖어드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한다. 그녀는 그렇게 허탈한 삶을 이 강가를 서성이며 풀어내기도 하고 언 가슴을 던지고 돌아서기를 수십 번 반복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강물이 친구처럼 정겹고 다정하다고 했다.

강물이 맞닿은 어느 강줄기에 그녀가 차를 세운다. 잘 자란 벚나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보랏빛 버찌들을 매달고 손을 흔든다. 가느다란 가지에 수북이 매달린 버찌는 마치 우리를 기다리다 지쳤다는 듯이 휘어잡고 버찌를 따서 먹었다. 개구쟁이들처럼 손바닥, 옷 입술 혀가 온통 보랏빛 물감으로 물들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영락없이 웃음 많은 여고생이다. 서로 바라보며 웃고 또 웃었다. 정오의 햇살에 뜨겁게 달궈진 강물도 따라 웃는 듯했다. 버찌같이 농익은 그녀, 이제는 누군가의 가슴에 소리 없이 스미고 있음이리라. 보랏빛 손바닥이 유난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점심을 먹기 위해 달렸다. 구름 몇 조각이 시샘하는지 가끔 하늘에 험한 인상을 그었지만, 그것마저 감사했다. 왜가리 한 마리가 수심이 낮은 곳에 서 있다. 출입 금지라는 팻말은 없었지만 키 작은 나무 울타리가 쳐졌다. 휘어진 강 허리가 물비늘을 반짝이며 다가서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붕어찜을 시켰다. 어릴 적 개울물을 양쪽으로 막아놓고 물을 퍼내어 붕어를 잡던 추억이 어깨를 툭 친다. 무나 고구마 줄기를 넣고 끓여 주시던 어머니의 손맛이 생각났다. 푸짐한 붕어찜을 게 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바로 이 맛이야.” 어릴 적 수시로 먹던 음식을 별미라고 떠들며 먹는 우리의 모습에서 아득한 세월이 느껴졌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햇빛에 유독 반짝인다. 아무려면 어쩌랴!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일탈을 꿈꾸는 소녀로 살고 싶은 이 순수를 누가 말릴 것인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일행 중 누군가 들뜬 목소리로 외친다. 추억은 늘 그립고 아름답다. 일행은 손가락으로 렌즈를 만들어 움직임 없이 지켜보는 왜가리를 마음속에 담아서 돌아섰다. 팔당댐을 건너서 돌아오는데 하늘은 유쾌하고 즐거움으로 물든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내놓는 입김과 같은 안개”(김승옥의 『무진기행』)를 읽고 양평의 안개를 꼭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안개 없이도 넉넉한 하루였다. 늦장을 부려도 탓하지 않는 사람, 마음을 나누는 친구라면 더욱 좋고, 말없이도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 사람이 하면 더 좋다. 흘려들어도 괜찮을 투정 같은 내 말을 새겨준 지인이 있어 얼마나 행복한가. 헤어져서 혼자 돌아오는 데 따끈한 마음 하나 달려온다. “오늘 행복했어! 다음엔 더 좋은 시간 만들어 줄게.” 핸드폰 가득 그녀의 구김살 없는 마음이 길을 환하게 밝혀 준다.

술 한 잔 없이도 넉넉한 마음 씀에 취하고, 자연의 싱싱한 유혹에 흠뻑 취하고, 좋은 사람들과 만남에 취하고, 몇 날을 추억에 취해 보낼 것을 생각하니 뚜벅뚜벅 걸어오는 행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