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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 심청 잔치를 벌이다 / 이미영

에세이향기 2022. 5. 5. 20:29

효녀 심청 잔치를 벌이다 / 이미영

 

 

 

열세 살 난 계집아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치마폭을 뒤집어 쓴 채 삼킬 듯이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자진했다. 효도밖에 모르는 어린것이 아버지를 살리겠다고 천길 물로 뛰어들었다. 뱃머리에서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두 손을 꼭 잡은 소녀의 잔상이 남아있다. 그림 속 어린아이가 아무리 눈물을 삼키며 서있어도 긴장감은 생기지 않았다. 인형극이며 동화, 거기에 주워들은 이야기까지 보태져서 그 후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뒷일이 오히려 선명했기 때문이다. 인당수에 빠지기 전의 고난은 지워지고 꽃으로 피어난 이후의 삶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효녀 심청 그와 나는 처음 만난 그때나 지금이나 딸자식이라는 처지 하나 밖에는 손톱만치도 닮은 점이 없다. 젖먹이를 두고 어머니는 저세상으로 떠나고 아버지는 앞 못 보는 신세가 되었느니 어찌할 터인가. 그녀의 짧은 생애는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환생 이후의 시간도 아버지에게 속해있었다. 소녀가장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위해 살다가 아버지를 지키려고 투신한 그의 삶이 이제 와서 내 곁으로 온다.

내리사랑은 넘치게 받아도 치사랑은 늘 억지춘향이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처음 몇 해 동안은 애가 타서 쫓아다녔다. 스무 해가 다가오는 지금은 내 몸 편하자고 꽁무니를 뺄 틈을 살핀다. 아버지를 돌보던 엄마마저 치매로 자신을 잃어간다. 정성은 옅어지고 짜증이 더해간다. 매일 인당수에 빠지는 것 같은데 꽃이 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친정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어린 심청이 떠올랐다. 그녀는 혼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눈 먼 아비와 둘이서 얼마나 막막했을까, 효녀라는 무거운 굴레까지 씌우는 세상은 또 얼마나 무서웠을까. 눈물을 삼키는데 그녀의 치맛자락이 서걱거린다. 소녀 심청 너도 이렇게 몰래 울 때가 있었겠지. 효녀의 대명사인 너라도 벗어나고 싶은 적이 있었겠지. 오늘은 이제 그만 잠잠 하려나. 내일은 또 어떤 일로 호출하실까. 두 분만 남기고 돌아오는 길은 늪에 빠진 듯 발목에서 무릎으로 점점 더 빠져든다.

며칠 연거푸 친정을 드나들었다. 전화기가 고장이 났네, 은행을 가야하네, 아버지 혈압이 갑자기 높아진 것 같네, 엄마의 주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매일 아침 8시 안부를 확인하는 전화기가 고장이면 응급상황이다. 얼마 전부터 혼자서 은행 일을 볼 수 없는 엄마는 언제 오느냐고 휴대전화기의 1번을 꾹꾹 누른다. 고혈압 때문에 중풍을 만난 아버지의 혈압이 고르지 않으면 신경이 곤두선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와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가 딸을 찾는다. 부르면 당장 달려갈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 밖에 없는데 나는 이제 그만 도망가고 싶은 거다. 휴대전화에 엄마 번호가 뜨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핑계거리를 찾아 머리를 굴리지만 걱정이 슬며시 뒤를 따른다. 이대로 잠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청이는 어찌 견뎠을까. 그녀에게는 차라리 쉬웠을지도 모른다. 걸음마를 떼면서 아버지의 눈이 되고, 밥이 되어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앞뒤 없는 시주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내놓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전설의 효녀가 되었으니 말이다. “네가 잘 사는 길이 효도”라고 하더니, “우리는 우리끼리 잘 살 테니 걱정마라”하더니 “자식이 있으니 좋구나.”하고 “미안하다, 고맙다.”하며 전화통을 붙잡는다.

엄마는 주일 아침 목사님을 만날 때마다 우리 딸이 효녀라고 추켜세운다. 친척들이 안부전화를 해도 잊지 않고 효녀 딸을 들먹인다. 그 덕에 나도 모르는 사이 심청이 대열에 서게 되었다. 마지못해서 들락거렸는데 대신 할 사람이 없어서 엄마의 손을 잡았는데 어느새 착한 자식으로 둔갑했다. 속을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해서 부모가 만들어준 효심 깊은 딸로 산다.

나는 궁금해졌다. 인당수에 뛰어든 심청은 용왕을 만나고 연꽃을 타고 환생한다. 황제의 배필이 되고 맹인잔치를 열어 아버지를 만난다. 공양미 삼백 석은 아무 효험이 없었지만 죽은 줄 알았던 딸의 목소리는 심 봉사의 간절함을 발동시켜 붙었던 눈을 뜨게 만든다. 하필 잔치를 열어야 했을까. 나라님과 함께 고향으로 행차를 하면 되었을 것을. 금의환향을 마다하고 눈 먼 아버지에게 궁궐까지 찾아가는 힘든 여정을 거치게 했을까.

심청전의 하이라이트는 맹인잔치다. 스스로 공양미가 되어 거친 물살 속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이 중요 대목인줄 알았는데 오산이다. 청이의 환생도 황제의 아내로 발탁됨도 떠들썩한 잔치를 위한 포석이다. 심 봉사가 눈을 뜬 사건은 어린 딸이 전생에 닦은 효행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맹인잔치는 효녀 심청의 대관식이다.

나는 매주 엄마가 차리는 잔칫상에 앉는다. 목사님 앞에서 엄마는 나팔을 불고 엄마의 친구들은 북을 울린다. 정작 가짜효녀는 벌여놓은 잔치판에서 어설픈 춤을 춘다. 효녀는 부모님의 입에서 나와 내게 모방하게 만든다. 인당수에 빠지는 기분은 착각이다. 그래서 꽃이 되지 않는 것이다.

심청이는 직접 잔치를 마련하고 음식을 차렸다.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오롯하여 소문난 잔치를 벌일 수 있었다. 너도나도 오라고 초대했다. 효녀라 칭송하든 더 빨리 부친을 편히 모시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든 아무 상관없었다. 잔치판은 그런 것이다. 흥겨움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마음껏 먹고 마셔도 술술 내려가는 날이다. 인당수에 풍덩 빠진 다음에 잔치를 열 수 있다.

나는 잔치에 못 가겠다. 떡이 넘어가지 않고 미소를 지을 수 없어 벌여놓은 자리에도 가지 못하겠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가 보다. “미영아 미안하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푹푹 빠지는 발을 내 집으로 돌리는 나를 어쩔 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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