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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여름이 좋다/ 장석주

에세이향기 2022. 5. 11. 04:03

여름이 좋다/ 장석주

 

 

 

태양에게 자비심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불볕을 쏟는 태양은 만물에게 아주 가혹한 시련을 안길 따름이다. 한낮 이마에 떨어지는 촛농이라니! 태양이 이마를 태우려 드는구나. 한낮 태양이 던지는 금빛 그물에 포획된 생물은 허덕거린다. 하지만 나는 여름이 좋아! 여름이 오면 내 안에 사는 이마가 반듯한 착한 소년이 환호작약한다. 태양은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숲속 활엽수의 잎잎은 기름을 바른 듯 반짝인다. 저 먼 곳에 있는 푸른 바다는 더욱 파랗게 빛난다. 태양이 만물에 흩뿌리는 빛은 그것이 기쁨, 희망, 자애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태양 아래서 토마토와 복숭아, 자두가 둥글게 익어 간다.

 

한낮 공중에서 타던 해가 떨어진다. 해 진 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질 때, 지금 여기에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돌연 멜링콜리로 물드는 기분을 사랑한다. 사방에 어둠이 내리면 후박나무와 단풍나무 잎이 수런거린다. 집 근처에 온 너구리가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움직이는 기척을 느낄 때, 나는 여름 저녁이 좋아지는 것이다. 땀을 씻고 갈아입은 면 셔츠의 까슬까슬한 감촉에서 내 안의 부정적인 기분은 옅어지고 좋은 삶에 대한 기대감이 차오른다. 손에 쥐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대신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이 일으키는 행복감을 떠올린다.

 

우리는 꿈꿀 때 꿈인 걸 모르듯이 사랑할 땐 사랑을 모른다. 사랑은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기도 전에 왔다가 지나간다. 어쩌면 당신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당신이 돌아온다면 나는 실패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받을 수도 있으리라. 해가 진 뒤 대숲에 깃드는 되새 떼는 시끄럽다. 밤의 어둠에 초원의 빛과 꽃 핀 영광을 삼켜 버리겠지만, 깊은 산속 옹달샘을 솟고, 달은 공중 높이 떠오르리라. 오, 아주 조그만 발가락을 가진 새여, 영원 속을 지나가는 이 전대미문의 아름다운 저녁을 네 작은 혀로 노래하라! 운명의 좋은 전조로 선명해지는 새와 옹달샘과 달을 다 품을 이 여름 저녁을!

 

향기로운 여름 저녁, 어떤 찰나와 사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대는 일어나 큐피드의 활시위를 당겨 화살통에 있는 화살을 다 쏘아라! 화살이 떨어진 곳에서 그대의 사랑과 미래가 피어나리라. 사랑은 내일의 일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날들 속에 있다. 늦가을 시든 담쟁이 넝쿨은 새파랗게 다시 살아오며, 지난해 유월에 피었던 붉은 장미는 올해 새롭게 돌아온다. 지나간 사랑도 새롭게 돌아오리니. 내 삶을 달콤하게 만들었던 그것들! 오, 나의 과거이자 미래가 될 여러 일이여!

 

저물 무렵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길고양이, 등고선, 수련이 피는 여름 새벽 못 위로 떨어지는 비, 바람에 마르는 빨래, 잘 세척해 가지런하게 쌓은 흰 접시들, 나선형의 계단, 자두의 맛, 솥에서 방금 꺼내 껍질을 벗겨 먹는 하지 감자, 쩍 하고 반구로 벌어지는 수박을 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바닷가의 솔숲, 바람결에 실려 오는 오렌지 향, 트럼펫 소리, 항구에 정박했다가 이국으로 떠나는 여객선의 긴 뱃고동, 두툼한 민어회, 흐릿한 불빛 아래서 늦은 밤에 먹는 카레라이스, 숨통이 끊긴 채 죽어가는 염소, 텅 빈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녀, 죽은 개, 수탉의 볏 같은 맨드라미, 오래 입은 옷의 솔기, 헤어진 여자의 뒷모습, 무죄의 추정, 봉쇄 수도원의 회랑을 오가는 수도사의 그림자, 모란과 작약의 둥근 꽃봉오리, 세상의 모든 버드나무, 낯선 장소에서 듣는 바흐의 파르티타 선율, 여행지에서 읽는 젊은 시인의 시집, 대성당의 종루에서 울려나와 저녁 하늘에 파문을 만들며 퍼져 나가는 종소리, 몽골 초원에 세운 게르에서의 일박.

 

해마다 여름은 봉인된 채로 도착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뱀과 잘 익은 자두와 복숭아, 그리고 별로 띠를 두르는 은하수와 함께 온다. 나는 착한 소년처럼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서 이 봉인된 것을 조심스럽게 열어 본다. 나는 이 온화한 여름 저녁을 그대의 뺨과 입술에게 돌려주려고 한다. 사랑은 자주 길을 잃고, 그 사랑이 나아갈 길과 방향을 가리키는 별은 없다. 이미 소금장미가 되어 버린 애인이여, 내 사랑은 지나갔고 혼자 남은 나는 오래 슬펐노라고 말하겠다. 이 여름 저녁, 누군가 내 귓가에 행복에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속삭인다. 행복도 너무 흔해지면 그 체감은 덜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해마다 불행의 그물을 찢으며 돌아오는 여름의 행복은 줄어드는 법이 없다. 당신에게 왔던 그 금빛 여름이 나의 여름을 질투해서 파업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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