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 이복희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뜬 사진 한 장. 다리 난간 안쪽에 놓여있는 신발 두 켤레에 눈이 시리다. 한강에 투신한 부부의 이야기였다. 자신들이 존재했었다는 마지막 증표였을까. 아니면 삶의 미련을 내려놓듯 벗어버린 것일까.
그것을 보며 굳이 속내를 짐작해 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신발에서 느껴지는 결연함은 눈물겹고 쓸쓸하다. 그러나 또 한편, 그 광경은 너무도 태연해 보였다. 마치 바깥나들이를 마치고 흔연하게 벗어놓은 것처럼.
신발을 벗는 일은 그저 일상인 줄 알았다. 저렇게 삶의 마침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삶을 내던지며 남겨놓고 떠난 신발이 어떤 이에게는 생의 애착과 아쉬움이 되기도 한다.
“내 신발이 없어”
병고에 갇혀 일상을 빼앗긴 언니의 공허한 표정이 말보다 먼저 다가왔다. 언니가 찾는 신발은 물론 침대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하얀 실내화가 아니었다.
“신발? 여기 있어”
알면서도 짐짓 실내화를 들어 보이는 내 마음을 외면하듯 막막한 시선이 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에 가 있다. 산에는 벌써 가을빛이 짙게 물들었다. 작년 늦가을에 시작한 요양원살이가 벌써 일 년이 되어간다.
요양병원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다. 언니에게는 바깥세상이 진즉에 갈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오고 갔던 거리와 산천이 오히려 저 세상의 그것처럼 아득하기만 할 것이다. 신을 신고 땅을 밟아본 지가 언제였는지 아슴아슴한 언니에게 멀어진 것이 어찌 신발뿐일까.
언니는 신발치레가 좀 심한 편이었다. 발이 작아 맞기만 하면 우선 사들였고 디자인이 좋아서도 사 모았다. 파란 반짝이 구슬이 화사하던 여름날의 샌들, 젊은이들처럼 즐겨 신던 어그 부츠를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다시는 누릴 수 없는 일상이 거기에 모두 담겨 있을 것이다.
유난히 꾸미기를 좋아했고 외출할 때는 모자며 장신구를 거의 빠트리지 않던 사람. 화장은 물론이고 손톱, 발톱도 늘 곱게 다듬던 언니의 삶은 그러나 별로 따뜻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치장들은 추운 속내를 달래기 위한 몸짓에 지나지 않았을까 싶다. 언니가 찾는 것은 이미 신발이 아니었다. 가망 없는 목숨의 안간힘이었다.
어느 날, 현관에 놓인 내 신발들을 새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것들이 모두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려니 점점 더 그렇게 느껴졌다. 문득 뭉크의 그림 ‘절규’가 떠올랐다. 나중에는 비명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턱관절이 아팠다. 얼른 눈길을 돌렸다.
신발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사진속의 것도, 언니의 것도 모두 한 사람의 생애를 떠받치고 있었으니 사연이 없을 리 없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려오기라도 하는 듯 나는 귀를 모아봤지만 그저 가슴만 아려왔다.
그런가 하면 무심히 신고 벗던 신발이 부호처럼 느껴졌다. 생의 역동성과 소멸의 시간이 함께 새겨져, 한 생애의 흔적으로 남는 부호. 이제 자신과 무관해져 하릴없이 빈집에 남아있는 언니의 신발은 아직 말없음표다. 언젠가는 한 점 소실점이 되고 말, 말없음표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부터 구두 고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멋이나 취향을 앞세우기 보다 우선 편해야 했다. 차츰 굽 높이가 낮아지다가 컴포트 슈즈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편한 것도 잠시, 노년층의 전유물 같이 되어 있는 그 신발이 영 탐탁지 않았다. 발도 생각해야 했지만 아직 남아있는 내 여심을 도무지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염치없는 허영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다시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지면으로부터 겨우 6센티미터 높아졌을 뿐인데. 그것도 뒤꿈치만 살짝 들린 것인데 기분이 달라진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 6센티미터는 내가 체감하는 세월의 간극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가벼운 긴장감이 피돌기를 새롭게 해주었다. 공중부양이라도 한 듯 황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며칠 가지 못해 발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발이 편하면 맵시가 떨어졌고 모양이 마음에 들어도 발이 어떤지 눈치를 봐야 했다. 몸은 그렇게 종종 마음을 배반하곤 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일이기도 한 것을.
이래저래 수가 늘어나 제법 신발장을 가득 채운 그것들은 지금 쉼표를 찍고 있다. 아직은 쉼표인 내 신발도 언젠가는 말없음표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뿐인가, 어느 날인가는 마침내 종지부로 남을 것은 당연한 일. 그것이 순리다. 너무나 야멸찬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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