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적삼을 입은 여인
이 병 남
중복 더위의 만원버스에는 모시적삼 차림의 20대 여인이 승객의 눈길을 끌었다. 화장기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얼굴과, 김장밭에서 갓 뽑아 올린 무 같은 목선이 태깔 고운 모시적삼의 풀기로 더욱 돋보이는 여인이다. 연속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 내리기에 바쁜 승객들도 힐끔힐끔 모시적삼의 여인 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각기 치장하고 나선 여자 승객들은 눈길이 마주치는 민망스러움을 피하려는 듯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는 다시 또 보곤 한다.
한동안 화학섬유에 밀려 빛을 잃었던 자연섬유가 그 진가를 되찾으면서부터 거리에는 면이나 마, 혹은 모시옷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많아졌다. 버스가 정차하자 모시적삼의 여인은 총총히 보도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버스는 다시 무악재 고개를 넘어 독립문 쪽으로 내리달린다. 열어 제친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중복의 열기와 함께 잊었던 것에 대한 향수를 몰고 온다.
할아버지께서는 해동하면 모시밭에 거름 주는 일을 재촉하셨다. 냉한을 막아주고 거름을 잘 해야 실하고 질 좋은 모시풀이 자라기 때문이다. 초여름 비바람 치는 날씨에는 웃자란 모시풀이 바람에 쓰러질세라 대문 밖을 서성이는 할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뒷짐을 지고 걸으셨다. 할머니가 모시고장으로 유명한 한산 출신이셨으니 마을에서 한곳밖에 없던 모시풀밭은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위해 장만하셨을 거라는 생각을 왜 미처 못 했을까.
모시풀은 쐐기 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이다. 끈기와 전통을 사랑하는 여인들의 노작으로 그 껍질은 여름철 옷감이 되는 모시를 짜낸다. 모시풀이 모시 한 필을 짜내기까지에는 능숙하고 부지런한 여인의 솜씨로도 꼬박 석 달 열흘은 걸린다 하니 그 번거로운 품이 어떠한지 짐작이 간다.
빠르면 6월, 늦게는 10월까지가 모시풀의 수확기다. 모시풀을 베는 날은 일손이 많을수록 좋다. 모시풀을 베고, 잎사귀를 훑고, 껍질을 벗기고, 다시 겉껍질을 훑는 일까지를 물이 마르기 전에 끝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남정네들이 잘 갈아진 낫 끝으로 모시풀을 삭독삭독 잘라 뉘면 아낙네들은 잎사귀를 훑어낸다. 그리고는 모시풀의 중간쯤을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잡고 작근 분질러서 모시풀의 껍질을 벗겨 모은다. 벗겨낸 껍질이 물이 마르기 전에 대칼을 이용해서 그어 내리면 겉껍질은 벗겨지고 섬유질만이 남게 된다. 이것을 물에 담가 우려내어 말린 것을 태모시라 한다.
푸른빛을 벗어나지 못한 태모시를 모시칼로 톱고, 이로 째고 손톱으로 가르고 하는 일을 모시 째기라 한다. 모시를 쨀 때는 태모시를 다시 물에 적셔서 부드럽게 한다. 물에 불린 태모시의 양끝을 모시칼로 톱아 낸 후 왼손 엄지손가락을 세워 거머쥐고 오른손 엄지손톱으로 여러 갈래를 내고 손가락 사이사이로 훑어내려 가닥을 낸다. 이때 태모시는 째는 사람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가닥이 난다. 모시올의 굵고 가늘기는 이 모시 째기에서 결정이 나는 것이다.
삼이나 모시를 째는 데는 짧은 손톱보다 긴 편이 유리하므로 길쌈을 삼는 아낙네들은 생산의 도구로 손톱을 길렀다. 때로는 기른 손톱 위에 봉숭아물을 들여서 아름다움을 가꾸기도 하였으니 여인의 손톱 기르기와 물들이기는 우리 나라에서 모시 짜기가 시작되었다는 삼한시대부터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왠지 서글퍼지는 것은 오늘날의 여인네의 지나치게 긴 손톱과 여러 빛깔은 게으름과 사치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째놓은 태모시를 한 가닥 한 가닥 이어가는 작업을 모시 삼기라 한다. 가늘게 짼 태모시 한끝을 다시 앞니로 두 갈래를 내어 가르고 다른 한 가닥의 끝을 끼어 넣고 맨살의 무릎 위에 놓고 상하로 비빈 다음 소쿠리나 채반에 사려 담는다. 이것이 모시의 씨실과 날실이 된다. 또한 이것을 뭉쳐 놓은 것을 모시굿이라 한다. 모시풀이 모시굿이 되기까지는 특별한 기구나 기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서 마을의 아낙네들은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혹은 농한기를 이용해서 모여 앉아 모시를 째고 삼는 일에 힘썼다.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일정한 양의 태모시를 서로 나누어 갖고 누가 먼저 큰 모시굿을 완성하는가를 겨룬다. 승부가 결정이 나면 진편에서는 떡이나 그밖에 음식을 장만하여 나누어 먹는다. 이러한 풍습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추석의 전통이 뿌리가 된 것이다. 모시 한 필을 짜내기 위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혹은 시누이와 올케가 한 등잔불 밑에 모여 무릎을 마주 대고 비비는 모습은 화목과 근면과 생산을 같이 하는 정경이다.
모시굿이 모여지면 모시올의 굵기에 따라 바디새를 정하고 모시를 난다. 모시를 나는 날은 길일을 택한다고 보통들 말을 한다. 모시를 날 때는 마당에서 불을 다루며 날실에 콩풀을 먹여 말리는 작업이 온종일 계속된다. 그러기 때문에 비가 와서는 물론 안 되고 바람이 세면 불씨가 날리고, 바람이 전혀 없어도 풀이 더디 말라서 일이 늦어지고―. 도투마리에 날실이 모두 감길 때까지는 햇볕이 쨍쨍 쪼여야 한다. 길일이란 결국 햇빛 좋고 바람 적당히 부는 날일 수밖에 없다. 씨실로 쓸 꾸리는 틈틈이 감는다. 꾸리를 감는 일은 그리 힘이 드는 일은 아니어서 노인들이 일손을 돕기도 한다.
이제 베틀에 올라앉아 모시를 짜는 일만이 남았다. 잉아대가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북이 쉴 새 없이 오가며 바디치는 소리가 잦아지면 드디어 한 필의 모시가 완성된다. 베틀에서 끊어낸 그대로의 모시를 생모시라 하는데 생모시 그대로 옷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태깔 곱고 순백한 모시는 마전을 한 것이다. 모시를 마전할 때는 생모시를 잿물에 삶아 햇빛에 거듭 바래어 탈색을 한다. 모시는 한산 세모시를 으뜸으로 치는데 "세모시 한 필을 뭉치면 주먹 안에 든다" 하니 참으로 그 솜씨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모시야 적삼 아래
연적 같은 저 젖 보소
많이 보면 병납니더
담배씨만큼 보고 가소
라고 노래한 풍류도 여인네의 그 솜씨가 아니고서야 어림인들 있으랴.
갑자기 버스는 속력을 놓아 세종로 네거리를 가로질러 달리고 차창으로는 5천 년의 문화유산을 보존할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전을 알리는 현수막이 날아든다.
모시적삼을 입은 여인이 곱다고 생각할수록 우리의 것이 자랑스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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