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닮은 듯 닮지 않은 / 조일희

에세이향기 2022. 12. 6. 02:41

닮은 듯 닮지 않은 / 조일희


엄마가 교통사고로 입원한 지 여러 달째다. 내가 밤마다 병간호한 지도 그만큼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던 날, 엄마가 나를 붙들었다. 하는 일을 잠시 쉬고 당신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단다. 엄마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으며 먼저 나서지 못한 나의 용렬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동안 받기만 했는데 효도할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주사 줄이 주렁주렁 달린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사실 지근거리에 있는 두 오빠 대신 멀리 사는 나를 콕 집어 당신 곁에 앉힌 엄마가 내심 고마웠다.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뜻 아니겠나 싶어서였다. 한껏 우쭐해진 나는 앞뒤 상황을 따져보지도 않고 엄마 곁에 남기로 단박에 결정했다.
‘부족했던 효도를 이번 참에 모두 하리라’ 넘치는 의욕이 깨춤을 추었다. 골절된 다리뿐 아니라 욕창으로 벌게진 엄마의 등과 엉덩이를 수시로 쓰다듬고 주물러 드렸다. 간호 일은 몸만 돌보는 거로 끝나지 않았다. 온종일 누워있는 엄마는 걸핏하면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질러댔다. 다른 사람 말은 소용없었다. 내가 어린아이 달래듯 살살 달래면 그제야 잠잠해졌다. 엄마의 생리적 뒤처리까지 치우고 나면 몸은 절인 배추처럼 까라졌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하루 치 효도를 해냈다는 자족감 때문이리라.
서푼짜리 우쭐거림은 금방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병시중은 어설픈 마음으로 덤비는 게 아니란 걸 병원 잠을 잔 지 며칠 만에 알았다. 엄마는 섬망 상태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했다. 환한 낮에는 말짱한데 창밖이 어둑어둑해지면 상상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멍한 얼굴의 엄마가 낯설었다. 초점 잃은 엄마를 볼 때면 카랑카랑한 예전의 엄마로 하루속히 돌아오길 바랐다.
이 바람은 누굴 위한 바람인가. 정정한 엄마를 보고 싶다는 간곡한 효심인가, 힘든 병구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불량한 양심인가. 엄마의 입원 날수가 더해갈수록, 좁은 보조 침대에서 자는 날이 많아질수록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나는 지쳐갔다.
지난밤에도 엄마와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저녁밥을 새 모이만큼 드신 엄마는 입가에 치약 거품을 잔뜩 묻혀가며 빡빡 이를 닦았다. 개운하게 양치질을 한 엄마는 침상에 누워 의미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탁자 위에 있는 녹두 알만한 수면제를 제시간보다 앞당겨 드렸다. 약을 먹고서도 엄마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먼 이국땅에 있는 당신의 막내아들을 부르는가 하면, 환자복 주머니를 홈착거리며 있지도 않은 돈을 찾기도 했다.
며칠 밤의 불면으로 알량한 내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다.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훅 올라옴과 동시에 간이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들짝 놀라는 엄마에게 “자라고, 엄마가 자야 나도 잔다고” 두 눈을 홉뜨며 말했다. 쏘아대는 말에, 시퍼런 눈빛에 뾰족한 가시가 돋았으리라. 구순이 다 된 엄마는 고개를 돌려 부릅뜬 내 눈을 피했다. 건 하품을 하며 억지로 눈꺼풀을 붙이는 엄마를 보자 이내 연민과 후회로 마음이 보각거렸다.
밤새 잠들 수 없었다. 핏발선 눈과 부스스한 머리로 병원 문을 나섰다. 얼른 도망치고 싶었다. 가증스러운 효심에서, 부끄러운 양심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내게 ‘효’란 무엇인가. 적당한 생색내기와 치졸한 체면치레가 나의 효도란 말인가. 얼마나 깊이가 얕으면 이토록 쉽게 바닥을 드러낸단 말인가.
성치 않은 엄마 얼굴 위로 장성한 아들 얼굴이 겹친다. 오래전, 아들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내 손으로 뒤치다꺼리를 하고 내 눈으로 지켜봐야만 안심이 되었다. 밤이고 낮이고 아들 곁에 붙어있었다. 잠결에도 내 눈과 귀는 아픈 아들을 향해 있어 꼼지락거리는 소리에도 후다닥 일어났다. 몇 달여를 그렇게 아들의 손발이 되어 병원 밥을 먹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아니, 힘들어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견딜 수 있었다.
엄마가 뒤척일 때면 서너 번을 미루다 겨우 일어났다. 엄마의 앓는 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얼마나 아픈지 살뜰히 챙기지 않았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내 불효의 면죄부가 될 순 없다. 내가 뜬 눈으로 병상의 아들을 지켰듯이 엄마도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나를 지켰을 것이다. 내 육신의 곤비함보다 아들의 회복이 더 중요했듯이, 엄마 또한 당신의 안위보다 딸의 생사가 더 중했으리라. 오활한 나는 여태껏 마음에 커다란 빚진 줄도 모르고 무람없이 살아왔다.
서쪽 하늘이 저무는 노을로 검붉다. 병원을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디무겁다. ‘어젯밤 일을 엄마가 기억할까, 잘못했다고 말하면 엄마 마음이 좀 풀어질까’ 꿉꿉한 마음으로 병실에 들어서는데 엄마가 나를 보고 웃는다. 가여운 우리 엄마가.....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다. 딸이자 어미인 나는 가없는 사랑을 받아 건네주는 전달자이며, 그 사랑을 끝끝내 갚지 못하는 채무자이다. 삶은 이렇듯 닮은 듯 닮지 않은 사랑의 환環으로 이어져 유유히 흘러간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빨래 / 정은아  (0) 2022.12.11
아버지를 읽는 시간 / 문경희  (1) 2022.12.07
그림이 말을 걸다 / 조일희  (1) 2022.12.06
활자나무- 이승애  (1) 2022.11.23
다시 책시렁에서 / 이지영  (1) 2022.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