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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말을 걸다 / 조일희

에세이향기 2022. 12. 6. 02:40

그림이 말을 걸다 / 조일희

 

 신문을 넘기려던 손을 멈췄다. 오른쪽 귀퉁이에 실린 작은 그림 한 장이 눈에 띄어서였다. 아이 손바닥만 한 그림 사진 옆에 전직 대통령의 은닉재산 중 하나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림 값이 억대라고 친절하게 덧붙여 쓴 기사는 실감할 수도 없는 금액이거니와 의미 또한 없었다. '가을 정류장'*이란 그림만이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때때로 감성의 결너비가 맞는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진한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감미로운 선율은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가락은 깊은 울림으로 온몸을 전율케 한다. 또 글은 어떠한가. 따스한 시구 한 줄은 강말랐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고, 서늘한 글귀 한 줄은 나태했던 정신을 곧추세워주지 않던가. 하지만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던 적은 여태 껏 없었다.

 

 '가을 정류장'은 쓸쓸해 보였다. 그림 속 풍경은 쇠잔해가는 오후 햇볕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깊어가는 가을을 붙잡고 있었다. 벌건 양철 지붕은 제 색깔을 잃어버린 채 나지막이 앉아있고, 색 바랜 지붕 뒤로 쪼그라진 서너 개의 감이 마른 가지에 간당거리고 있었다. 쇠락한 감나무의 잎사귀에선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 풍경은 적요했다.

 

 그림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뒤편에 있는 기억을 불러냈다. 저 풍경처럼 텅 빈 시골정류장에 나 홀로 서 있었다. 어둑어둑해진 정류장에서 한참이나 오지 않는 버스를 무연히 기다렸었다. 산마루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만나고 내려오던 날, 메마른 가슴이 갈잎처럼 버석거렸다. 화가는 나와 함께 아버지를 만나고 온 것처럼 삭연한 마음을 '가을정류장'에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바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온 까닭이다.

 

푸르른 나뭇잎을 나부끼며 싱그럽게 웃어야 할 나이였다. 꽃을 피우고 열매을 맺어야 할 나이였다. 하지만 내 삶은 고빗사위였다. 조락한 잎새처럼 시들어가던 나는 병약한 아버지를 마음 한 구석에 밀쳐놓고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누구의 배웅도 없이 홀로 먼 길을 떠나셨다. 삶에 치여 고수련하지 않았다는 건 변명이고 핑계일 뿐이다. 오랫동안 그리움과 죄책감이 한데 엉겨 나를 사무치게 했다.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르면 재 너머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를 만나고 온 어느 가을날, 그날의 단상斷想을 시 한 편에 그려놓았었다.

   가을, 재를 넘다

   곰티재를 넘으니

   가을이 먼저 와 있다

   산마루 상수리나무 벗 삼아

   알알이 영그는 사연 나누시던 아버지는

   이 가을 보랏빛 도라지꽃 되어

   잔잔히 나를 반겨주신다

​   진한 그리움에 목이 메여

   세상에 시린 가슴 다 풀어 놓지 못하고

   그저 사랑을 제수祭需 삼아 절을 올린다

   청명한 하늘마냥 푸르른 웃음으로

   넉넉히 보듬어 주신다

   곰티재를 내려오니

   깊은 가을이 버얼써 와 있다

 손바닥만 한 그림이 재 너머로 나를 이끌었다. 갈참나무와 함께 아버지는 평온히 누워계셨다. 그해 가을 다 나누지 못하고 가슴 깊이 담아두었던 시린 이야기를 이제야 아버지께 풀어놓는다. 도사리 같은 나를 오늘도 아버지는 따사로이 안아주신다. 느꺼움에 다시 목이 메었다.

 그림 한 점이 이렇게 마음을 울컥하게 하다니, 처음 느껴보는 색다른 울림이다. 그림이 준 감동의 잔향이 오랫동안 마음에 머무를 것 같다.

* 거울 정류장 : 감나무를 많이 그린 '오치균'의 그림이다. 작가의 고향집 앞마당에 있던 감나무는 궁핍했던 유년의 표징이며,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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