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참나무를 읽다
김현희
옹이와 한 몸으로 사는 나무에선
묵은 종이 냄새가 난다
찢어진 쪽수처럼
상처는 나무의 이력을 늘려간다
청설모는 굴참나무의 교정사
밑줄 긋듯 나무를 타고 오르며 상수리를 정독하고
솎아 낸 탈자들로 새끼를 키운다
새순에선 갓 출판 된 신간처럼 풋내가 난다
다람쥐의 건망증이 놓친 알맹이들
가벼운 것은 봄바람에 속을 드러내고
묵직한 것들만 싹을 틔운다
바람이 할퀸 나무는 더 단단하게 계절을 복사하고
폭우를 뚫고 나온 풋열매로 빼곡하다
금세 꺾이고 삭제되는 비문 같은 잔가지들
벌레가 지워버린 떡잎,
밝은 책 넘기듯 빛바랜 굴참나무를 펼치면
잘 여문 행간들이 쏟아진다
해를 거듭하며 고서古書가 되어가는
굴참나무에선
옆구리에 끼고 다녀 익숙한 문장처럼
오래된 향기가 난다
움푹 팬 밑동에 몰려든 풍뎅이들
수액 마시기 전
껍질에 숨은 숙성된 내용을 음미한다
홍어/하린
기억의 유속은 왜 이리 빠른가
끝까지 버티라고 참으라고 말한 사람까지 데려간다
그러니 새우깡에 소주를 마시며 밤새 과거를 더듬던
그는 한 마리의 홍어다
후일담을 위해 삭힐 대로 삭힌 분노의 맛
조절이 불가능한 어둠의 맛이 되어 취해간다
캄캄한 항아리 안에 날것의 기억 하나를 집어넣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그날의 심정, 한 줄기를 올려놓고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뚜껑을 닫고 지낸다
바깥은 내내 소란스러워도
어떤 기척도 쥐 죽은 듯한 시간 안쪽으로 흘러들지 못한다
잔인한 바다를 목격한 바람이 허청허청 지구를 떠돌다 돌아와
돌담집 마당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려고 할 때
기억의 살점들이 들썩인 건 우연이 아니다
변질도 변절도 되지 않은 채 똬리를 틀고 있던 분노가
고개를 쳐드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럴 때 김빠진 소주는 맹물처럼 달다
녹아 없어진 줄 알았던 애간장에 피가 돌기 시작하면
삭힘은 썩음이 아니다 중독이 된다
남몰래 차려놓은 제삿밥을 먹으러 오는 자 누구인가
내장까지 통째로 넣고 끓인 톡 쏘는 맛 지닌
오욕이 둥둥 떠다니는 슬픔을 떠먹으려는 자 누구인가
바다와 대작하던 그의 눈빛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귀결점은 그믐을 닮은 한 사람 곁이지만
불콰하게 취한 시간과 시간이 만나
끝내 싱싱함을 잃지 않은 집착이 된다
숨 죽였던 계절의 맨살은 다시 붉어지고
국물/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들뜨기/윤석산 (0) | 2023.02.17 |
---|---|
신진련 시 모음 (1) | 2023.02.17 |
어머니 (이시영) (0) | 2023.02.15 |
여, 라는 말(나희덕) (0) | 2023.02.15 |
너와집 한 채/김명인 (0) | 2023.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