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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당김 줄 / 배단영

에세이향기 2023. 4. 4. 16:30

당김 줄 / 배단영

 

 

 

 

 

남산 자락 삼릉에 가면 나무들이 당김 줄로 버티고 있다. 휘어진 채 밑으로 쓰러지려는 나무들을 잡아당기며 같이 견뎌보자는 모습이다. 당김 줄을 보면서 진료를 받기위해 찾아온 부부를 떠 올렸다.

 

 

언젠가, 같이 시각 장애를 가진 부부가 진료를 받으러 온 적이 있었다. 풀잎 같은 여자가 더듬거리며 문을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누구라도 당황해서 홍당무처럼 붉어질 정도로 무안하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달팽이처럼 천천히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접수를 했다. 접수를 하면서 남자의 상태가 어떤지 무엇이 필요한지 소상하게 설명까지 했다.

 

 

곧이어 그녀의 시선은 뒤따라 들어온 남자를 찾았다. 적당한 자리에 앉힌 다음에야 그녀는 접수를 했다는 말과 조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남자를 배려하는 모습이 따뜻한 찻집에 걸린 수채화 한 폭처럼 편안해 보였다. 조금이나마 시력이 남아있는 그녀가 세세한 것까지 남자에게 전해주는 것이 일상이 되어있는 듯이 보였다. 그녀의 말을 열심히 듣고는 아내의 말에 공감을 한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선천성 시각장애인이었다. 인간의 몸은 오묘하다. 하나가 제 기능을 못하면 다른 신체부위가 활성화되거나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남자는 일찌감치 안마시술사로 주위에 소문이 나있었다. 어깨가 결린다던 원장님도 시간을 내어 그에게 치료를 받으러 가는 것을 간혹 보았다. 다녀온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는 보이지 않는 신체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잘 만진다고 했다.

 

 

그녀는 후천적인 장애인이다. 남자와는 달리 한쪽 눈의 신경이 조금 살아 있는 약시장애인이다. 그녀가 남자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남자가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가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생겼다. 오랜 경험으로 웬만해서는 넘어지는 일이 없었지만 운명적인 만남을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그들은 그 일이 인연이 되어 부부가 되었다.

 

 

그녀는 남자의 빛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뚜렷하게 그의 지표가 되어주었다. 세상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그녀의 출현은 보이지 않는 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했다. 그가 어둠속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팽팽하게 당겨주는 당김 줄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녀였다. 수백 년 자란 노송을 견뎌내게 해주던 당김 줄을 보면서 나는 누구의 당김 줄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오래 전, 남편의 사업이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다. 서로가 보증을 서주고 힘이 되어 주던 일들이 경제위기라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자 한 치도 앞을 내다보지 못한 상황에서 신뢰는 깨여져 버렸다. 친한 사람들 모두가 협력자와 조력자였지만 한 순간 죄인이 되고 미운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 서로에 대한 증오만이 남아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갔다. 서로 의지하며 웃음꽃을 피우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원수지간으로 등을 돌렸다

 

 

실의와 절망은 사람을 망가뜨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긴다는 생각보다는 버틴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시간을 버티고 자신을 버텨 상황을 극복해야한다고 나는 자주 주문을 외웠다. 그 상황에서 남편에게는 내가 당김 줄이었고 나에게는 남편과 아이들이 당김 줄이었던 것 같다. 버틸 수없는 힘든 상황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 한 솥밥을 먹는 가족들에게는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본을 흩뜨리지 않는 용기를 낳게 했다.

 

 

사람과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듯 서로에게 의지하고 위로받을 때 세상은 살 만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사랑도 누군가 내 옆에서 보듬고 지지해 주기에 소중한 것이다. 늘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행복한 것만은 아니어도 속을 앓는 것도 잠시잠깐이라면 인생전반에 있어서 기쁨과 슬픔을 나눌 힘은 그 속에 있다. 서로가 넘어지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해주는 힘, 이해해 주는 힘은 바로 당김 줄처럼 단단하게 우리를 받힌다.

 

 

큰 나무뿐만 아니라 간단하게 채마밭을 보아도 고추며 가지, 오이 등이 홀로 서 있는가. 줄을 치고 작대기를 세우고 끈으로 묶어 쓰러지지 않도록 관리를 해주어야 한다.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 단단하고 지탱하기에 적당한 것을 대 주어야 한다. 많은 고추를 달고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목이 툭 부러져 버리거나 넘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혼자 버티지 못하는 것을 누군가 슬쩍 거들어주기만 해도 얼마나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가.

 

 

나 자신을 보아도 세상을 모를 때는 겁도 없이 쉽게 생각하고 움직임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사에 시달려서 인지 위축감을 느낄 때가 많다. 예전처럼 쉽게 움직이려 들지 않고 천천히 이것저것을 재보며 제자리걸음을 한다. 그러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름 판단하기 힘들거나 어렵게 생각되어지는 부분에 대해 의논하고 조언을 구하게 된다. 상대방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의지를 하게 된다. 아마 상대도 나와 같은 바람으로 곁에서 동행하고 있지 않을까.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까이 있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친구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힘든 일을 겪고 나서야 타인에 대한 나의 부덕함을 한탄하며 반성하기도 한다.

 

 

오늘 나는 노송들이 서로를 독려하는 당김 줄에서 서로가 서로를 상생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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