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 사윤수
무척 가깝고도 먼 것이 있다. 사람들은 밥을 앞에 놓고 신(神)을 섬기며, 밥을 먹으며 구원을 바란다. 허구한 날 두세 끼를 먹으니 밥은 그저 세속적일 분이고, 도무지 경지에 이르기 어려운 해탈과 보이지 않는 진리는 밥 저 너머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밥 없이 과연 그런 지고한 삶의 실천이 가능할까. 세상에는 섬기고 싶어도 섬길 밥이 없고 밥 자체가 구원인 사람도 많다.
한때, 우리 가족의 밥이 풍전등화의 지경이 되었다. 재화에 과도한 탐욕과 집착을 부리다가 내가 그만 우리 집 살림을 거덜 내고 말았다. 깡그리 적빈이 된 것이다. 환란을 피해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소읍으로 떠났다. 한국의 이별 문화에서 ‘밥 잘 먹고…….’라는 송사를 어찌 빼놓을 수 있으랴. 우리는 서로에게 그저 ‘밥 잘 먹고’라는 말만을 건네며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속에는 절망하지 말고, 잘 견디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나는 어느 강변 근처에 단칸방을 얻어 홀로 짐을 부렸다. 겁이 많은 나는 적막이 무서워 빈 사과궤짝 위에 얹어둔 낡은 텔레비젼을 켜놓고 밥상을 차리곤 했다. 익숙하던 삶의 방식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바뀔 때 사람들은 곧잘 밥을 거절하거나 밥 앞에서 운다. 그러나 감정의 추상적인 의미를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며 눈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은 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뽀얗고 소복한 밥이 눈물의 원근(遠近)에 알알이 아롱질 때 서럽지 않을 존재가 있으랴만 나는 울다가도 밥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다. ‘불현 듯 식욕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언가 골수에 사무친 것’이며 ‘참으로 아름다운 건 배고픈 저녁의 밥 한 그릇’이라는 시구가 있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내게 따스한 밥 한 그릇은 귀한 벗이며 나에게 힘을 주며, 내 입속에 들어가서 씹히며 기꺼이 무저항의 헌신이 될 터였다. 삶의 무게에 기진맥진해버린 나를 밥은 다시 조금 조금씩 일으켜 세워주었다.
시간이 흘러, 이산가족이 다시 모였다. 남편은 밑천을 아슬아슬하게 구하여 식당을 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식당업은 천민이 하는 줄 알았다. 밥은 내게 더없이 소중했으나 식당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자신감도 없었다. 무엇보다 요리 실력조차 섣부르니 그 일만은 하지 않으려고 온갖 변명을 대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나아가려면 앞에 흐르는 강을 건너야 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그때는 밥을 위해 수십 상자의 책을 죄다 버렸다. 새로 이사 갈 곳에 책을 놓을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핑계를, 모든 것을 버리고 현실에 적응하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삼으며 마치 분서갱유 하듯이 애꿎은 책을 배신했다. 플라톤을 주머니에 꽂고 전쟁에 나간 병사가 허기 속에서 빵을 찾았듯이 밥 속에서 길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먹여주셨고, 결혼 뒤에는 남편이 벌어주지 않았던가. 밥을 구하는 길이 그토록 고된 줄은 난생처음 알았다. 찬물 더운물에 손등은 떡갈나무 껍질처럼 부르텄다. 식당에 딸린 임시 건물 방은 비좁고 몹시 추웠다. 피곤한 등이 방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으나 천근의 몸을 일으켜야 했다. 논산훈련소 신병 훈령이 이만큼 험할까 싶었다. 온 가족이 그렇게 매달리던 몇 년이 지나자 다행히 밥이 우리에게로 왔다.
나는 밥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밥을 팔아 밥을 먹으면서도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정 금액만 내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뷔페식이다 보니 손님들은 음식에 욕심을 낸다. 밥은 얼마든지 있으니 한꺼번에 많이 푸지 말라고 당부를 해도 남겨서 버려야 하는 밥이 음식물 쓰레기통에 넘친다. 기도를 열심히 한 뒤에 밥을 먹고 간 사람들의 뒷자리도 거의 마찬가지다. 엉망진창으로 못다 먹고 퍼지른 학생들에게는 손님이라는 사실도 아랑곳없이 나는 냅다 고함을 친다.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8억 명이 넘는다고!
걸인들이 자주 가게에 찾아온다. 한 푼을 받아가기도 하고, 시적시적 밥을 먹고 싶다는 이가 있다. 서른 날에 아홉 끼니인가. 뼛속까지 고파 보인다. 삶의 찬 서리에 젖어 돌아앉아 밥을 먹는 그 뒷모습이 나의 연민을 세차게 흔든다. 헌 옷이 부지기수로 버려지는 세태이니 주워 입을 옷이야 많건만, 밥은 상하지 않은 것으로 제때 먹어야 한다.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통정(通情)은 오히려 미풍양속으로 보인다. 그곳의 윤리는 밥이었다. 정에 굶주린 자에게 어느 누가 하룻밤 정을 주어도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만의 배를 채우려고 이웃의 밥을 훔치면 그 누구라도 가차 없이 생매장을 당한다. 가뭄과 흉작이 심하여 자식들의 밥조차 보전하기 어려운지라, 부모는 칠십 살이 되면 살아있어도 까마귀 떼 날아오르는 굴참나무 숲 나라야마 산에 버려진다.
어떤 준엄한 교리보다 나는 밥을 통해 삶을 배우고 싶다. 타인을 향한 소모적인 비난보다 밥으로서 나를 조절하고, 혼자서도 겸허하게 밥을 잘 먹고 싶다. 그것은 한편, 외로움이나 노후의 설움에 익숙해지기 위한 중요한 연습이기도 하다.
이 밥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밥을 받으리라.* 눈앞의 것은 잘 보이지 않고 봐도 소중한 줄 모른다. 사십오 년 넘게 밥을 먹고 살아왔지만 나 역시 아직도 내 먹을 양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 욕구를 다스리지 못하니 무슨 깨달음으로 나아가랴. 다만, 환하게 밝힌 등불 같은 고봉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그 무언의 가르침을 일신의 경전으로 삼는다. 쉽고도 어려운 밥, 밥은 형이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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