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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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떡시루에 김 오르듯 /김은주

에세이향기 2023. 9. 17. 03:40

떡시루에 김 오르듯 

 

                                                                                                                                  김은주

 

 팽팽하게 부풀었다. 아침나절에 섞어 둔 떡 반죽이 몸무게를 두 배로 늘렸다. 그릇을 감싼 비닐에 이슬이 맺혔고 주걱으로 공기를 빼 주는 와중에도 살아 꿈틀거린다. 막걸리 안에 들어있던 효모가 밀을 만나 주거니 받거니 얼마나 정을 나눴으면 식솔이 저리 늘었을까? 아기 엉덩이 같이 부푼 반죽을 못자리 갈아엎듯 뒤집으니 공기층이 거미줄처럼 엉켰다. 뒤집어 품었던 공기가 빠져나가자 부푼 반죽이 힘없이 주저앉는다. 주걱으로 진정시킨 반죽이 뒤척이며 내는 몸내가 가히 폭발적이다. 시큼한 과일 향 같기도 하고 농익은 곡주 냄새 같기도 하다. 부풀다 주저앉은 반죽을 다독여 이차 발효를 시켜놓고 배나무 가지를 치고 꽃도 실한 것만 남기고 모두 따 준다. 서원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에 물기 가득하다. 눅눅한 바람에 보리 풋내도 묻어 있고 알싸한 양파 향도 더해온다. 누가 꽃이 좋아 초록이 좋아 물어 온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초록이다. 아무리 푸성귀를 욕심스레 먹어도 더는 푸르러질 일이 사라진 나이라서 그런지 꽃보다 초록이 더 귀하다. 멀리 실눈 뜨고 내다보니 온통 푸른 물결이라 어디가 보리고 어디가 양파인지 알 길이 없다. 부녀회장님 밭은 물어볼 것도 없이 양파 일터이고 저수지 좀 못미처에 있는 푸른 밭이 내심 궁금하다.

 보지 않고 짐작만으로 부풀어 오른 상상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한다. 경험을 상상으로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만으로 부풀어 오른 이야기는 한번 휘저으면 단숨에 주저앉아 버리는 떡 반죽 같다. 보고 짐작하던 바를 몸으로 익혀 나만의 어투로 쏟아낼 때 글은 분명 살아 움직인다. 글과 오래 사귀다보면 나도 모르게 인이 배긴다. 몸속에 문신처럼 새겨지는 몇 가지 현상을 나는 업業이라고 부른다. 배워 쓰는 글과 새겨 쓰는 글을 서로 견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학습으로 이루어진 글은 다양성이 거세된 똑같은 모습의 쌍둥이다. 각자 글을 쓴 사람은 다른데 글꼴은 한결같으니 행간에 도사린 지루함을 떨치기 힘들다. 하지만 몸에 새겨진 이야기는 덧입을 옷도, 현란한 장치도 필요 없다. 그저 마음 깊은 용소龍沼에 숨어있는 명주실꾸리 풀어내듯 술술 뱉어내면 그만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날것의 사람살이야 말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명문장이다. 쓰고자 작심해서 쓰는 글과 몸이 움직여 제 신명에 쓰는 글은 태생부터 다르다. 생각이 돋아 쓰는 글이 흐르는 물이라면 궁리 끝에 태어난 글은 고인 물이다. 자연스럽기야 어디 흐르는 물만 하겠는가?

 반죽이 다시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며 강낭콩을 삶는다. 팍팍하니 보드라워질 때까지 삶아 물기를 거둬놓고 대추채를 썬다. 우선 씨를 발라내고 얇게 포를 뜬 대추를 동그랗게 말아 김발에 싸둔다. 말은 대추가 몸을 다져 모양을 만들면 얇게 썰어준다. 썬 단면이 회오리처럼 잘 감겨야 대추 꽃이 곱게 핀다. 마지막으로 석이버섯을 물에 불려 돌을 떼 내고 이끼도 긁어낸다. 말끔히 장만한 버섯도 가늘게 채를 썰어둔다. 발효는 기다림이다. 사람이 대신 할 수 없는 일을 효모가 스스로 해내도록 무심히 지켜봐 주는 것이다. 촉촉한 광목 보자기로 떡 재료를 덮어 놓고 집을 나선다. 저수지 아래 푸른 물결이 궁금해서다. 큰길 따라 올라가니 들판이 온통 파랗다. 늘 양파만 무성하던 들판이 올봄은 묘하게 출렁거린다. 해마다 청보리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올해는 앉아서 보리 구경을 할 수 있다니 이 무슨 횡재인가. 눈으로 호사를 즐기는 동안 보리는 더 깊게 몸을 뒤척이며 푸른 물살을 만들어낸다. 물살을 헤치며 논둑길에 내려가 보니 세상에 보리가 아니고 밀이다. 멀리서 눈으로만 짐작하던 나의 상상이 보란 듯이 깨지는 순간이다. 집 마당에서 볼 때는 영락없는 보리였고 눈앞에 두고 보니 밀이다. 밀이건 보리건 간에 푸른 물결에 옴팡 홀린 것은 사실이고 아닌 척 딴청을 피워 봐도 진즉에 점령당한 내 마음은 푸른 파도에 익사 직전이다.

 흠뻑 빠지는 일을 두려워해서야 어디 흥興을 만날 수 있을까? 우선 보리인지 밀인지 분간이 어렵더라도 먼저 취하고 볼 일이다. 눈으로 취하고 흥이 올라야 오감이 열린다. 사방 걸림 없이 열리는 순간, 세상이 말랑해진다. 단단함을 버리고 말랑해진다는 것은 무엇이든 깊숙이 받아들일 자세가 됐다는 뜻이다. 내가 보고 반한 풍경 위에 다른 겹겹의 풍경이 포개져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될 때 세상은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가 비로소 글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무언가에 취한다는 것은 세상을 낯설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일이다. 가끔은 온몸을 던져 푸른 물살도 만나보고 무한히 흔들려도 봐야 낯선 감동을 맛볼 수 있다. 스스로 감읍하지 않고 누구를 울릴 수 있단 말인가? 눈 밝은 독자는 말하기 전에 알아채고 읽기 전에 짐작해버린다. 읽지 않고도 유리알처럼 속이 훤히 보이는 글은 그예 목숨이 다한 글이다. 숨이 다한 글을 생산하지 않으려면 먼저 몸을 움직여 살펴본 후 백지와 대면해야 한다. 몸으로 쓴 글이 펜으로 쓴 글보다 더 힘이 세기 때문이다.

 양껏 팽창한 반죽을 감나는 시루에 안친다. 시루 모서리를 서너 차례 두드려 마지막 공기까지 빼 주고 시룻번을 붙인 다음 갖은 고명을 올린다. 솥 안에 물이 너무 끓어도 시룻번이 떨어지니 김 오르기 전에 얼른 붙여야 풍성하게 김이 오른다. 시루와 솥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서로 틈 없이 이가 잘 맞아야 떡이 설익지 않고 고루 쪄진다. 시간이 갈수록 솥뚜껑이 격렬하게 들썩인다. 시루 눈물은 아래로 흐르고 뽀얀 김은 위로 치솟는다. 잠시 자욱한 김 속에서 앉아 떡을 기다린다. 어떤 맛이 들지 언제쯤 익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들썩이는 흥취에 기다리는 순간이 잠시 설렌다. 처음에는 센 불로 시루를 달구고 얼추 김이 올라 익는 냄새가 나면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러본다. 젓가락에 가루가 묻어나지 않으면 다 익은 거다. 그럼 불을 끄고 뜸을 들린다. 위로만 치솟던 열기를 가라앉히고 남은 여열로 속까지 뭉근히 익혀야 한다. 바쁘게 들썩이던 뚜껑도 잠잠해지고 자욱하던 김도 사라지면 완성이다. 한 김 나간 증편을 자른다. 고명 올린 위는 매끄럽고 자른 단면은 폭신하다. 공기가 지나간 자리마다 오롯이 문양만 남았다.

무릇 살아 들썩여야 진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꿈틀거려야 온전한 내 것이 된다. 어떠한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부단히 움직일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제대로 글이 익으려면 제재 없이 자유로워야 한다. 누구의 간섭도 필요 없고 저 홀로 삭고 부풀어야 감칠맛이 터져 오른다. 막을 수 없이 쏟아지는 말이야 말로 순정한 언어다. 그리 보면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터져 오르는 말을 받아 모시는 거다. 불규칙하게 쏟아지는 말은 어떤 기교도 거뜬히 넘어설 수 있다. 규칙이 사라져야 상상의 극점을 맛볼 수 있고 이론을 버려야 남과 다른 글을 쓸 수 있다. 오늘도 무수한 글이 탄생하고 죽음을 맞는다. 어제 쓴 글이 오늘 가뭇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희미한 탄생이지만 여태 살아남은 글도 있다. 사라지는 글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꿈틀거리는 글에서 그 이유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쓰는 일은 참으로 오묘한 것이어서 오늘도 나는 전율처럼 글이 쏟아지기를 바래보지만 허사다. 타고난 재주가 없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생물인 글이 나고 자라 다시 멸할 때까지 마음만은 떡 시루에 김 오르듯 부단히 들썩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쏟아지는 글을 다 받아내지 못해 시름시름 앓는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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