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라옥순
"곱게 화장도 해드렸습니다."
유리문이 열리며 들은 첫마디였다. 체온 없는 공기가 덮쳐온다. 고운 화장이라니, 시선이 허공을 헤맨다. 공감을 얻는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인접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세수라면 몰라도 화장이라는 말은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이것은 삭제되어야 할 문장이다. 텅 빈 화면에서 멈춘 커서처럼 방황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엉킨다. 한생을 글로 엮거나 입담으로 풀어낼 때 말미가 전체를 아우르는 경우가 있다. '했습니다.'가 아니라 '해드렸습니다.'에 붙들린 시간이 뒷걸음질 친다.
제대로 된 화장대는 차치하고 화장수 한 병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부르튼 곳에 바르는 연고뿐이다. 갈라진 발뒤꿈치에 걸려 올이 뜯긴다고 결 고운 이불을 덮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장롱 속 명주이불은 이제 제구실도 못 하고 한순간 연기로 사라질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검불 같은 생이 짊어지고 온 지난한 삶이라는 것에 울화가 생긴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삶에 얹힌 생이라. 이내 바람 한 점 피할 곳 없는 벌판에 홀로 선 것처럼 허허로워진다.
요동 벌에서 호곡장好哭場을 외치던 순간 그도 자신이 백지에 찍힌 한 개의 점처럼 느껴졌을까. 뜬금없이 무연한 연암에게 묻고 싶어진다. 극으로 치닫는 감정이 슬픔인지 원통인지 칠정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애곡哀哭이든 아니든 기댈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우는 울음은 내면의 자신을 향한 것일 터였다. 소리로도 발하지 못한 호곡의 묵음을 삼킨다. 후회뿐인 지난날이 목울대를 옥죈다. 추억은 행복의 편린이고 기억은 고통의 조각일지도 모른다. 모난 기억들이 폐부를 찌른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외면하기에는 조도가 너무 높다.
다시 봐도 생경하다. 이제껏 분단장한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간극이 먼 비문을 읽는 것처럼 답답하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내고 전쟁을 겪느라 젊을 때의 사진 한 장 없어서 꽃다운 청춘을 연상할만한 흔적도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이미 40대였으므로 젊은 시절을 비켜선 모습이었다고는 하나 당연한 것처럼 무감했었다.
옆도 돌아볼 여력 없이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온 생이 나이 저물어 느슨해질 때가 있었다. 자신을 위해 고집을 세운 것은 90 평생에 그 한철이었을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옷 고르는 일에 유달리 까다로워진 것을 가실 때가 되어 마음이 변한 것이라 치부했다. 그때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억눌러왔던 심정이 드러났다고 했어야 맞는 표현이었다. '세상의 모든 늙음은 젊음의 연속선상에 있고, 사람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는 문장에 주어가 되어보지 못한 생이 분단장한 얼굴로 누워있다. 꽃이 만개한 옷을 입고 열여덟 소녀처럼 웃어 보이던 가을 한 날이 주저앉는다. 꽃잠 드는 날 입고 있던 옷이 첫눈에 흡족해했던 옷이었음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지 분별조차 없어진다. 표백된 조명이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여과 없이 비춘다.
일각이 먼지처럼 부유한다. 한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살다 가는 생에 이승에서의 마지막 집을 지어주는 염장이 이마에 땀이 돋는다. 손끝에 일물일어의 진중함이 실려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에가 지은 고치 같다. 자신을 들여다보기에 고치만큼 좋은 집이 또 있을까.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부분 탈모가 생긴 조카가 동경하는 코쿤족을 생각한다. 관계의 삶과 과중한 업무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 누에고치처럼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만의 쉼을 갖고자 하는 이들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자유며 더 나은 살을 향한 몸짓일 것이다.
온전히 혼자가 되는 침묵의 시간,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 이생의 부족함이 채워지는 용화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염하는 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지막을 여민다. 모두 내려놓은 흔적이 희고 둥글다. 다음 생은 결 고운 생이라야 한다고 고치 위에 붉은 장미를 마침표로 얹는다.
유리문 밖에 주문처럼 춘설이 내린다. 꽃이 피었다가 지는 한순간을 백 년처럼 살다간 생이 노랑나비로 탈바꿈할 봄의 문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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