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화 / 설성제
부용은 연꽃 중의 하나다. 물에서 자태를 뽐내는 수련이, 진흙에서 향기를 뿜어내는 연꽃이 아닌, 나무에서 피는 연(蓮)이다.
한여름 땡볕 아래 피는 꽃이기에 누군가 곁을 맴돌기란 힘들 것이라 보호막이용 가시 같은 건 애초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바라기처럼 되바라지게 태양을 직면하지도 않는다. 사루비아, 맨드라미, 배롱꽃이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이유를 정작 모른다는 듯 부용은 희거나 연분홍의 저 다소곳한 빛깔로 작렬하는 불볕 아래 섰다. 강렬함으로 양립하기보다 순순함으로 존립하기를 선택했으니 내리쬐는 땡볕을 하소연하지 않는다. 타들어가는 속내를 붉디붉은 얼굴로 항명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묵언수행으로 주어진 계절을 건넌다.
여름 정오 무렵 대공원을 걷다가 무궁화인가 싶으면 접시꽃이고, 접시꽃인가 싶으면 무궁화 같은 부용 앞에 선다. 멋이라고는 없고 개성과 존재감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그것을 한참 들여다본다. 눈길과 마음을 끌 만한 게 보이지 않으니 스치면 그뿐인 꽃이다. 그러나 정작 여름을 고스란히 살라먹은 뜨거운 꽃이지 않은가. 어찌 타지도 녹지도 않고 한줄기 서늘한 낯빛을 내비칠 수 있단 말인지.
여느 꽃인들 시들고 마르지 않으랴. 자신에게 주어진 계절을 떠나보내며 아침저녁 색다른 바람이 선뜻선뜻 묻어오는데 언제 거기 있었냐는 듯 대궁에 쪼그라진 열기구처럼 달려있다. 한 번도 화려했던 적 없었으니 마지막 가는 길만큼은 눈길을 받고 싶었으나 삶과 죽음이 어찌 다를 수 있을까. 왔던 대로, 있던 대로 갈 때의 모습도 한가지이다.
아직은 서늘해지지 않은 한낮의 햇볕 아래서 부용화가 영면에 들기를 바라본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서늘한 모습을 보여준 부용의 역설적 표현을 나는 부용이 지는 대공원 뜰에서 읽고 있다.
부용, 나무에 달려 잠잠히 열반에 드는 중이다. 여기, 태양 아래 마땅한 연(蓮)으로 피어 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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