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경계 / 전미경

에세이향기 2024. 2. 2. 09:48

 

경계 / 전미경

봉분에 달라붙은 잔디가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매서운 한파 속에 잔디를 입힌 탓에 둥지를 틀지 못할까 봐 가슴 졸였는데, 온전히 뿌리내려 자리 잡은 걸 보니 내심 마음이 놓인다. 군데군데 잡풀이 눈에 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뽑히는 걸 보니 잡풀은 제집이 아님을 아는 모양이다.

상석에 술과 포를 올리고 절을 한다. 당장이라도 헛헛한 웃음 지으며 걸어 나오실 것 같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우리 딸 왔나.' 하며 반긴다. 마른 풀이 바람에 들썩인다. 힘겹게 받치고 있던 삶의 무게를 떨어뜨리기 위해 헤아린 흔적을 바람도 아는 눈치다. 자신의 시든 삶을 정리하다 살아온 결대로 남고 싶은 풀의 절규인지도 모른다.

봉분을 사이에 두고 현세와 내세의 길이 너무 멀다. 몇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 솟아오른 봉분은 두 세계를 음과 양으로 나뉜 채 만날 수 없는 경계에 닿아 있다. 지척이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분리된 삶과 죽음의 세계다.

생의 갈림길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긴장이 단애의 시간을 붙들고 있다. 닿을 듯 말 듯 이어질 듯 말 듯 언제일지도 모를 이별 예행연습은 늘 불안과 초조를 끌어안아야 했다. 치매를 앓던 아버지는 물먹은 솜처럼 아래로만 무게를 실었지 그 수분을 건조하지 못했다. 요양시설과 집을 오갈 때마다 아버지가 남긴 체취는 슬픔을 이고 있는 겹겹의 산이었다. 능선 하나를 건너면 또다시 이어지는 높고 큰 산이었다.
작은 몸짓 하나에도 바스러질 것 같은 당신의 모습은 생과 상의 경계에서 외줄을 탔다. 곡예사가 공중 줄타기에서 발을 헛디뎌 줄을 이탈할지도 모를 위태로운 순간처럼 아버지의 곡예는 관중의 숨죽인 긴장만큼 시간 속을 유영했다. 감각세포는 오감을 자극하면서 혈관을 흐르는 통증으로 돌아왔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인 경계에서 아버지는 죽음을 향해, 우리들은 이승을 향해 서로가 가진 양만큼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허물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치를 혼미한 의식 속에서도 아셨던지 아버지는 삶의 기억을 하나 둘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두둑한 배짱으로 쌓아 올린 자존심의 벽을 허무는 데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당신의 손끝에 남겨진 지문만큼 세월의 이력도 흐릿한 문체를 그렸다. 기억을 지우고 시간을 외면하는 동안 생의 끝점에선 힘겨운 사투가 벌어졌다. 아버지의 마지막은 비옥한 땅을 휩쓴 태풍의 매운 손길처럼 껍질만 무성한 쭉정이로 변해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벗어놓은 허물 사이로 삶의 자국은 부정父情의 땀수만 새겨놓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딛는 생의 종착역에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기처럼 가볍게 떠나기를 바라는 경계의 문이 열려 있었다. 생을 마감하면서 집안 곳곳에 남겨둔 듬성듬성한 흔적들, 당신이 베어 물다 멈춘 삶의 자국들을 손수 정리하지 못하고 떠나는 발걸음에는 얼마나 많은 아쉬움이 실려 있었을까. 팽팽한 긴장이 좀체 기울어지지 않은 채 수평으로 맞서고 있다.
노래를 참 좋아하시던 아버지다. 어린 시절, 하모니카에 들숨과 날숨을 불어넣어 화음으로 연주하던 모습은 당신이 짊어진 고난의 깊이를 풀어내는 유일한 통로였다. 어린 딸의 눈에 재단된 아버지와의 거리는 높아 오를 수 없는 성벽이었으나 턱 밑에 앉아 연주를 듣다 보니 경계는 어느덧 허물어지고 익숙한 정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뜻이 정확히 전달되지도 않았던 노랫말에서 꿈을 키우고 글줄을 살찌웠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영혼의 울림은 나를 지탱하는 질기고도 단단한 끈이었다.
염습사의 숙련된 손놀림에 의해 어머니가 손수 준비해 둔 수의가 굳어진 아버지의 몸을 받아들인다. 아버지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마지막 인사다. 삶을 벗은 육신이 새털처럼 가벼워 보인다. 아버지는 세상 빛을 떠나 어둠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섰다. 음양을 넘나드는 주기 곡선처럼 이별은 또 다른 세계로의 이음줄이었다. 보고 듣고 말할 수 있었던 감각기관은 일생을 쌓아 올린 영역을 떠나 무소유가 기다리는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하관식이 끝나고 선소리꾼의 달구질이 시작되자 봉분을 사이에 두고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살아온 빛만큼 어둠으로 향하는 통로에 생의 이력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새로운 세상과의 경계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높고 큰 문이었다. 여러 층의 단을 쌓아 올린 내부의 집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영원한 안식에 들어섰다. 더 이상 넘나들 수 없는 경계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먼 거리가 되었다.
오랜 시간, 스스로가 만든 경계와 실랑이를 벌이며 살아왔다.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해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분리의 테를 그리며 더는 다가설 수 없는 거리로 선을 그었다. 그 시간들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으며 힘겹고 아픈 외로움이었기에 스스로를 다지고 매만지는 반전이 되기도 했다. 생이란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도 내려올 것의 염려였기에 선뜻 경계를 이탈하지 못했다. 난 음양의 경계를 정확하고도 빈틈없이 그었지만 아버지는 어둠 속 음과 양의 경계를 어떻게 융합해 나가고 계실까. 봉긋한 봉분을 사이에 두고 생과 사, 만남과 헤어짐이 팽팽히 맞서는 날이다. 멈춰버린 듯 이어지는 봉분, 그 사이로 피어나는 초록 웃음이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있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불을 지피며/정원정  (2) 2024.02.02
갈목비 / 전영임  (1) 2024.02.02
말뚝 / 이은정  (0) 2024.01.30
등의 방정식​ / 현경미  (1) 2024.01.28
막차 / 문경희  (2) 2024.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