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내가 엄마를 간병하기로 되어있었다. 부산에서 아침 7시 기차를 탔지만 대구 병원에 도착한 건 9시가 넘어서였다. 미안한 마음에 “엄마!”하고 다가가는데 엄마는 대답 없이 자신의 환자복만 여몄다.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우리 큰딸을 만났을 텐데…. 오늘 잘 부탁해요.”
엄마의 눈빛이 달랐다. 나를 오늘 처음 온 간병인으로 여기며 나를 조심스러워했다. 지난밤 언니가 전화로 귀띰해 주었지만 우리 엄마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섬망’ 이는 약물 중독이나 수술, 또는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오는 신경정신질환으로 치매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조금 전까지 얘기를 나누던 가족을 못 알아보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링거 바늘을 빼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과도한 약물 복용으로 엄마의 뇌에 부종이 생기면서 섬망이 왔다고 했다.
엄마는 얼굴의 절반을 덮은 산소마스크를 끼고도 숨을 헐떡거렸다. 폐 세포가 서서히 굳어져 가는 병으로 인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지낸 지 어느새 십 년이다. 그래도 약을 잘 챙겨 먹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그럭저럭 버텨왔는데 갑자기 이렇게 나빠지다니.
산소마스크가 답답한지 엄마는 자다가도 몇 번 마스크를 벗으려고 했다. 만일 마스크가 벗겨진 채로 5분 이상 경과하면 환자가 위험해지니 잘 살펴보라고 간호사가 주의를 주고 갔다. 살아오면서 가슴 답답한 일이 많았던 엄마가 이젠 숨 쉬는 것까지 답답한 처지가 되었다.
한숨 자고 난 엄마가 내게 말을 걸었다.
“새댁은 이런 간병 일을 한 지 얼마나 되었어요?”
“…….”
“간병을 하러 다니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냉장고 안의 주스라도 한 병 꺼내 먹어요. 아직 젊고 기운 있을 때 열심히 버는 게 좋지.”
다행히 대화는 가능했다. 그러나 나를 못 알아보는 증상은 여전했다.
‘나이 들어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오. 자식은 부모를 찾아와 손을 벌릴 수 있지만 부모는 자식에게 손을 못 벌려요.“
자식들이 매달 보내주는 생활비와 용돈을 알뜰히 모아서 요양병원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은 모아두었다고 했다.
”예전에 어쩌다보니 집에 쌀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오. 다른 자식보다 형편이 나은 둘째 딸에게 말해볼까 해서 가긴 갔는데, 막상 딸의 얼굴을 보니 그 말이 나오지 않더군요. 딸이 가슴 아파할 것 같아서요. 딸이 안 볼 때 몰래 내 오버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만 쌀을 담아왔다오. 그게 어미 마음이라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학을 졸업한 동생이 취직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 지경이 되도록 나는 왜 몰랐을까.
초등학교 3학년 때 일기장에다 ”나의 소원은 빨리 돈을 벌어서 우리 엄마에게 한꺼번에 연탄 삼백 장을 들여놔 주는 거“라고 쓴 적이 있다. 선생님이 그 일기를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다. 대문 앞에서부터 연탄 광까지 헌 담요와 거적때기를 깔아놓는 공에 비해 고작 백 장의 연탄밖에 들여놓지 못하는 엄마를 보고 쓴 일기였다.
경제적 여유야 있든 없든 함께 나누어야 가족이다. 힘이 들면 힘이 든다고 말해 주어야 하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아차려야 가족이다. 얼마 전 저녁 뉴스를 보다가, 어느 교회에서 일요일 아침에만 나눠주는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노인들을 보았다.
긴 행렬이었다. 늦게 오면 그마저 못 받게 될까봐 새벽 다섯 시부터 줄을 선다는 이도 있었다. 자신의 부모가 몇 시간씩 그 줄에 서 있다는 걸 그의 자식들은 모를 것이다. 삼십 년 전 내가 우리 엄마 코트 속의 봉지 쌀을 몰랐듯이.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 엄마는 이 둘째딸을 알아보지 못했다. 퇴근 후에 병실에 들른 언니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온 간병인이 정말 성심성의껏 하더라며 간병비를 만원 더 넣어주라고.
그날 나는 ’섬망‘이라는 하나의 망을 통해서 엄마의 아픈 기억을, 그리고 자식을 아끼는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내 코트 주머니 속에는 때늦은 회한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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