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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악보 / 박금아

에세이향기 2021. 6. 16. 15:15

저녁의 악보 / 박금아

 

저녁은 살아 있는 것들의 귀착지. 무성했던 계획들을 접고 제집을 찾아드는 발걸음들로 저잣거리처럼 술렁인다.

모두는 저녁에 도착하기 위해 하루를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대낮, 새의 날갯짓이 먹이를 구할 비상飛翔이라면 저녁의 그것은 수고를 접는 안온함이다. 낮의 계곡물 소리가 먼 길을 재촉하는 느낌이라면, 저녁의 그것은 목적지에 무사히 안착해서 발을 푸는 평온함이다. 나무들도 광합성을 위해 온종일 햇볕을 좇던 가지들을 제 속으로 모아들인다.

저녁의 품은 더없이 넉넉해진다. 하늘은 넓어지고 길은 멀리에 뻗어 있다. 강가에 사는 이라면 더 넓어진 강폭을 만날 수 있고, 바닷가에서는 한층 깊어진 수심水深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맘때면 산 너머 사찰에서 들려오는 예불 소리, 저녁은 대웅전 마당처럼 음전하다.

졸참나무 한 그루가 비탈길에서 땅에 맞닿을 듯 누워 있다. 구새 먹은 둥치는 움푹움푹한 생채기들로 멀쩡한 데가 없고, 등산로 위로 솟아오른 뿌리는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채인 흔적이 역력하다. 삭정이가 된 가지는 한 번도 푸른 잎을 돋운 적 없고, 한 마리 새도 앉혔을 성싶지 않다. 졸참나무 아래 긴 나무의자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있다. 시골에서 살다가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몇 달 전에 아들네로 왔다는 손 씨 할아버지다. 언젠가부터 할아버지도 관악산의 저녁 풍경이 되었다. 아들 내외가 더없이 잘해주어도 온종일 집 안에 있기가 미안해서 식구들이 퇴근해 돌아오는 저녁때면 집을 나와 산 근처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찌 보면 졸참나무도 할아버지도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오랜 길을 서서 추위와 더위를 견뎌내느라 저 스스로 볕이 되고 그늘이 되기를 반복했을 게다. 뿌리는 서로를 섞어 푸슬푸슬한 흙 부스러기를 탄탄한 터로 만들었을 테고, 문실문실 뻗은 몸피는 울울창창한 숲으로 자랐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푸르던 날에는 젊은 날의 졸참나무처럼 우뚝했으리라. 가지 끝으로 모아들인 올망졸망한 햇살로 자식들을 알토란처럼 키워냈을 터. 그러는 사이 큰 나무 되었을 거다. 세상 숲으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도 몸뚱이 하나로 막아내며 끝 가지엔 작은 둥지 하나씩을 간신히 매달아 주었을 테지. 그러니 실은 졸참나무도 할아버지도 세상의 한 모퉁이를 지켜온 파수꾼들이다.

저녁때에 이르면 한낮에 볼 수 없던 것들이 보이고, 들을 수 없던 것들이 들린다. 앞서 걸어간 발자국들이 또렷해진다. 제 몸을 뉘어 자리를 허락해 준 풀잎들의 작은 몸짓 하나, 지름길은 물론 에움길에 있는 모든 걸음이 돋을새김으로 솟아오른다. 수많은 걸음을 딛고 선 때문일까. 만물이 있는 자리는 슬픈 영화의 정거장처럼 애잔하다. 힘든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어깨는 누군가를 향해 기울어져 있고, 눈빛은 또바기 젖어 있다. 그래서 저물녘이면 모두는 서로를 애차게 당긴다. 해거름이면 떠난 것들을 불러들이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려오는 이유다. 하느님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고 숨은 사람을 부르며 "너 어디 있느냐?"고 물었던 때도 저녁무렵이었다. 그렇듯 저녁은 길 위의 나그네들에게 떠나 온 곳을 향해 머리를 돌리게 한다.

산들바람이라 했던가. 저녁은 영락없는 바람둥이다. 꽃이란 꽃들은 다 꼬드겨 본 솜씨다. 저녁의 몸에는 수십 개의 현이 있는 모양이어서 눈길을 툭 스치기만 해도 모두를 음표로 피워낸다. 꾸꾸루, 깍깍, 비비비……. 새 소리뿐 아니다. 풀 이파리 하나, 물 한 방울, 돌멩이 하나도 저녁 속에서는 제각각의 길이를 갖는 음표가 된다. 파르르, 사르르르, 도르르르르……. 땅 위 땅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음표가 된다. 저녁은 살아 있는 것들이 함께 쓰는 오선지. 최선을 다해 하루를 건너온 걸음들이 저녁의 악보 위에서 음악으로 피어난다.

툭! 졸참나무에서 도토리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떼구루루 도돌이표가 되어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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