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필을 이렇게 가르친다
강 돈 묵
1. 창작 지도를 시작하게 된 계기, 이후 진행 과정, 그리고 성과
1993년은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획기적으로 바뀐 해이다. 이때부터 고교 졸업생 수보다 대학 정원이 많아서 대부분 대학이 정원을 채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교수는 있는데 학생이 없어서 수업을 진행할 수 없는 학과가 속출하고 폐과되는 경우가 발생했다. 정부에서는 이 난국을 평정하기 위해 평생교육법을 제정하고 대학에 지역 주민 교육의 길을 열어 주었다. 대학의 고급 인력인 교수를 활용하여 지역 주민에 대한 교육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방침을 정한 것이다.
내가 근무하던 대학은 신설 대학이라서 하나에서 열까지 갖추어진 게 어설펐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갖추어야 하는 처지였다. 교수들 역시 교육 경력을 가진 자가 거의 없었다. 오직 나 혼자만이 경력자라서 새로운 부서를 만들 때마다 내게 주어지는 일이 많았다. 신설하는 대학의 모든 부서에 관여해야 하는 처지였다.
학생처를 거쳐 교무처를 맡았고, 평생교육원도 개설해야 했다. 지역 주민에 대한 교육이 가능한 영역을 찾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인문학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당시 나는 소설을 공부하던 문학도였기에 소설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녁 시간의 여유로 소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수강생이 모이지 않았다. 개설에 성공한 것은 역시 수필 문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의 수필가들과 내 집에 모여 수필을 이야기해 오던 터라 수필 강의는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 강좌를 알리는 홍보지가 나가면 으레 수필창작 강좌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수필 강의는 내가 대학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쉰 적이 없다. 대학을 떠나서도 문학관에서 강의, 시민대학에서 강의, 인터넷을 통한 강의 등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시력이 떨어져서 올해 초부터 쉬고 있다. 매일 컴퓨터 앞에서 장시간 작업한다는 건 시력에 차단기를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금까지 배출한 수필가는 백여 명이 넘는다. 나름 보람도 느끼고, 자부심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동안 공부한 제자들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아 잡지의 지면을 채우고, 많은 작가가 개인 작품집을 발간하여 보내올 때마다 기쁨을 금할 수가 없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문제작을 발표할 때마다 내게서 공부한 제자들이 끼어 있음을 보면서 대견스럽기도 하여 보람 있었다고 자위하고 지켜보는 중이다. 하지만 남은 생을 수필 문학에 전념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 수를 헤아려 보면 아쉬움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게 평생교육의 한계일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는 않다.
교육자가 갖는 즐거움은 제자들의 활동 모습에서 크게 좌우된다. 숫자의 많고 적음에 한한 게 아니고, 수필에 대한 나의 열정이 그들의 작품 속에 녹아 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가끔은 나의 이런 부질없는 노력이 수필 문학에 누가 되지는 않았을지 되짚어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 긍지를 가지고 자위하는 편이라서 다행이다.
2. 지도 목표 내지 방향
수필은 비전환적 표현이라서 결코 허구를 용납하지 않는다. 반드시 작가의 체험 속에서 글감을 취택하여 글 쓰기를 요구한다. 자연스럽게 작가의 실생활이 글감이 되다 보니, 글을 대하는 태도에 수월함을 제공받는다고 오해한다. 이 점 때문에 작가들이 더러 수필을 안이하게 접하려는 경향이 있어 진수의 수필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탈하는 경우가 보이기도 한다. 다른 장르와 다르게 이 생득적 특질로 하여 안이하게 마음을 움켜잡는다면 커다란 착오를 범하게 된다.
시나 소설처럼 상상적 체험이나 허구에 뿌리를 내리고 탄생하는 문학이 아니어서, 오히려 수필가들을 힘들게 만드는 때도 있다. 이 특성은 교육적 차원에서 간단히 인식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상당히 고민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작가의 삶이 재료가 되다 보니, 자칫 작가의 경험을 시간적 공간적 흐름에 따라 기술하면 수필이 된다고 보는 견해도 나올 법하다. 그러나 그건 분명 아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큰 문제는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이다. 교육자의 입장에서 자주 야기되는 이 문제를 수강자들에게 어떻게 명료하게 풀어 정답을 제공할 수 있을까. 작가의 체험에서 수필이 출발하면서도 그것이 생활 작문이나 일기, 수기에 멈추어서는 안 되고, 문학의 영역에 들게 해야 한다는 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수필 강의를 하면서 수강자들에게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확실히 하도록 힘주어 가르쳐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래야 수강자들이 작가로서의 존재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비문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문학의 경지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글감의 본질을 찾고 그것에 작가의 삶을 밀어 넣어 의미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수필 쓰기는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작업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고, 우선 글감의 본질을 찾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는 인식부터 주지시켜야 한다. 이게 수필 교육에서 가장 명심할 대전제가 아닐까 한다. 나는 수필 강의에서 가장 앞에 두고 고민한 게 이 점이었다.
좋은 수필이란 참신한 소재, 참신한 해석, 참신한 표현. 이 세 가지를 갖춘 글이라고 흔히 말한다. 참신한 글감이란 남들이 전혀 다루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요구하는 게 아니고, 남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데도 작가만의 삶으로 해석해 내서 참신하고 개성적인 면이 두드러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존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작가만의 깨달음에서 얻은 참신한 것일 때 그 글감은 생명력을 얻는다. 작가의 삶이 문학의 영역으로 넘어오기 위해서는 이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해석은 작가의 삶에서 얻은 인생관, 문학관, 세계관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같은 글감을 앞에 두고 다르게 이야기하게 되는 것, 또한 그동안 작가의 삶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노력이 없이 쓰인 글은 문학인 수필이 아니고, 비문학의 영역에 머무는 글임을 깨닫게 교육해야 한다. 그래야 수강자들이 앞으로 깊이 있는 수필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다. 가능하면 초보자들에게는 사건 위주의 스토리가 있는 글감보다는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에서 얻어진 글감을 선호하도록 유도하는 게 효과적이다. 그리고 글감을 나열하는 예시 단락보다는 그것의 해석으로 얻어진 본질과 의미를 기술하는 일반화 단락이 글 길이의 칠 할 이상이 되도록 짜임새도 교육해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현상― 자연에 관한 것,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은 것, 자신의 생활에서 끄집어낸 것―은 어느 것이 되었든 진정한 글감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삶의 조각일 뿐이다. 문학적 글감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글감의 본질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의 해석이 필요하다. 수필 쓰기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교육이 절대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경험한 바를 그냥 줄글로 내리 적고는 수필이라 하게 되니 그를 작가의 길로 제대로 이끌었다고 볼 수 없다. 글감의 해석을 위해서는 비일상적인 시각, 뒤집어 보기, 현미경적 시각이 필요함을 귀띔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여하튼 수필가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는 마음가짐이 초기부터 제대로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진중한 마음가짐이 없으면 수필에 대한 인식도 희떠워지게 마련이다. 작가의 체험에서 선택해 글을 쓴다고는 하지만 그냥 마구 적는 게 아니고 글감에 대한 깊은 해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숙지시켜야 한다.
3. 지도 방법 및 주안점
가벼운 마음으로 강의실을 찾았던 초보자가 무거운 이론에 질겁하여 포기하는 경우는 막아야겠지만,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려는 수강생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고 마음을 다독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수필 문학은 취미가 아니고 학문임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너무 벅차게 접근하여 포기하는 경우는 없어야겠지만, 반대로 안이한 태도로 인하여 희떠워지는 건 더욱더 멀리해야 할 일이다.
이때 나는 ‘낯설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의 훈련을 반복했다.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 진즉 입에 담았던 이론이지만, 초보자들의 마음가짐에는 이 훈련부터 쌓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훈련이 되어야 진정한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여기서 ‘낯설게 보기’는 글감에 대한 해석으로 인식한다. 흔히 수필에서 작가의 체험이 토대가 되어 생산되는 결과물이라는 인식은 수필을 아무렇게나 끄적거리면 되는 것으로 여겨 우를 범하게 만든다. 여기에 차단기를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낯설게 보기’ 훈련부터 몸에 익혀야 한다. 이 훈련은 집필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주어 진중한 작가의 길로의 인도자 역할을 하게 된다. 작가에겐 진중하게 고민하는 게 기본이 아닐까. 그래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어야 글은 생명력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교 시절, 작문을 지도해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 시(詩)를 끝까지 읽어 보지도 않고 펜대를 들어 잉크부터 찍고 줄줄 선을 그어대며 시를 망가뜨리시던 선생님. 내용 파악조차 없이 그어대던 그 펜촉은 내 가슴에 칼날 같은 아픔으로 생채기를 내어 한동안 문학에서 떠나 있게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제 생각해 본다. 글쓰기 지도는 삼 단계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1차시에는 글의 내용을 가지고 깊이 있는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고, 2차시에는 이 글에서 주제를 살리기 위해 적합한 글감이 동원되었는가를 살펴봐야 하고, 3차시에는 구성과 문장, 어휘를 살피는 순서로 지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앞의 1, 2차시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조급하게 3차시만을 운영하고 글쓰기 지도를 수행했다고 하면 많이 어그러진 것이 아닐까. 오늘날 글쓰기 지도는 마무리 단계인 3차시만의 실행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안타까움이 있다.
현장에서 이와 같은 단계로 지도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어렵다 해도 기본은 이런 마음으로 진행하는 게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힘들더라도 점차 균형을 잡아 운영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형식에서도 다양한 구성이 시도됨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수강자들이 이제 처음 수필을 익혀가는 과정에 있기에 앞으로 신인으로 문단에 활력소를 넣을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기존의 형식에 굳어 있는 기성작가보다 활기차게 활동할 작가들에게 새로운 형식을 도모하게 함은 결국 수필의 영역을 넓히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문학 강의이기에 수강자들의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자율적으로 텍스트 문을 제공해 주고, 스스로 생각을 풀어 놓도록 함은 자연스럽게 수필의 이론을 익히는 계기가 된다. 수강생들끼리 토론하도록 두고 강의자가 물꼬만 터 주고 기다리면 된다. 이때 너무 멀리 가거나 분쟁이 일 기미가 보이면 바로잡아 주면 저절로 제 방향을 찾아간다. 이런 방법에는 참고 견뎌내는 강의자의 인내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특히 수강생의 작품을 다룰 때는 서로 감정싸움이 되지 않도록 합평하는 목적과 태도를 정확히 밝혀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서로 상대의 작품에 예의를 갖추는 모습도 교육되어야 한다. 괜한 자존심으로 수업 분위기를 망가뜨리는 자는 개인적인 차후 지도가 따라야 효과적이다. 분위기가 너무 고조되면 수강생의 작품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개인적으로 보아주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다.
4. 문제점 및 개선 방향
평생교육의 기회가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이 수필 교육을 원하고 있다. 본래 인간은 생활이 좀 여유로워지면 고급문화나 고급 예술을 접하고 향유하고 싶은 욕망에 쌓이게 된다. 요즈음 수필 문학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수강생 중에는 진정 수필 문학을 배우고자, 혹은 수필가가 되고자 오는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다른 목적이 있는 자도 있다. 수강자의 수강 이유를 정확히 알고 그들의 욕구에 맞는 강의가 진행되는 건 필수이다. 수필가로 데뷔를 원하는 사람과 그냥 수필이 좋아서 감상만 요구하는 사람과는 수용자세가 너무나 다르다. 분위기를 잘 조절해 가는 게 상책이다.
우리나라의 수필 데뷔 방법도 한번 고민해 보는 게 어떨까. 더러 보면 수필 강의를 하면서 잡지를 가지고 있어서 한 사람의 강의자 밑에서 공부한 사람들로 잡지의 신인과 필자가 채워지는 것도 보기엔 안 좋다. 조금은 다른 세계도 접할 기회를 제공해 줘야 다양한 수필의 영역을 만날 수 있고, 생명력이 길다. 그리고 좋은 수필도 기대할 수 있다.
여러 강의자에게서 공부한 사람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야 다양한 필자를 만날 수 있다. 이때 추천의 방법은 여러 강의실에서 추천을 받되, 지도자의 제자는 심사에서 빠지고 나머지 강의자가 심사를 보아 종합하여 문단에 배출하는 방법이라도 취해야 수필가들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 잡지의 생명은 신인 관리에서 확연히 갈릴 수 있다.
그동안 수필강의를 해 오면서 가졌던 생각을 대충 정리해 보았다. 이 글이 수필 문단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독자에 따라서는 나의 의견과 상반되는 고견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을 것이다. 나도 몰랐던 것은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졸렬한 글을 내놓으면서도 독자들의 이해를 구한다. 더러 결례된 경우가 있다면 용서를 바란다. 수필 문단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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