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연근조림/전경린

에세이향기 2021. 6. 29. 12:06

연근조림/전경린

 

 

 

고등학교 3학년에 오르던 해였으니 대입시험 준비로 마음이 비장했던 때였다. 대문의 하숙생 구함이라는, 종이를 코팅한 푯말을 읽고 살짝 쪽문을 밀었더니, 뜻밖에 햇살이 깊게 고인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흙담을 따라 커다란 호두나무들이 서 있고, 그 안으로는 온통 동백나무들과 키 작은 철쭉이 심어져 있었는데 일월 마지막 주에 벌써 동백꽃이 희고 붉게 피어 있었다. 햇볕이 환한 마당 가운데는 우물과 수도 물탱크가 있는 세면장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쪽문으로 들어설 때, 왜간장을 졸이는 희미한 냄새가 났다. 육십 줄에 들어섰을 것으로 보이는 골격이 큰 할머니가 옛날식 부엌문 앞에 놓인 화덕 곁에 앉아 들어서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쩐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할머니도 기별이라도 넣은 사람이 이제 당도한 것처럼 예사롭게 나를 맞았다. 할머니는 그때 연근을 조리고 있었다. 나는 연근조림을 처음 보았다.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었다.

첫날 아침밥을 먹을 때 몹시도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육십 촉 전구를 켠 안채 할머니 방 안에서 생면부지의 남학생과 단 둘이 겸상을 받은 것이었다. 우리는 통성명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 밥숟가락을 들었다. 두어 숟가락 밥을 떠먹은 남학생이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갑자기 방문을 활짝 열었다. 마당에 환한 아침 햇살이 촘촘한 그물처럼 내려와 어른거렸고 그 순간에도 몇 그루 동백나무에서 꽃들이 투툭투툭 떨어졌다. 걸레를 빤 할머니는 마당 가운데 우물 곁 세면장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무슨 고집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고개를 바로 들지 못하고 내 앞에 놓인 연근조림만 먹었는데 사각거리고 달큰하고 담백했다. 그리고 꽃 모양이 되도록 할머니가 일부러 뚫어놓은 것처럼 숭숭 뚫린 구멍들이 예쁘고 신기했다. 나는 그 전에 연근을 본 적조차 없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보다 일찍 하숙을 들어왔고, 그 남학생은 공부하느라 방학 중인데도 집에 가지 않고 남아 있었기 때문에 거의 일주일 가까이 단둘이서만 세끼 밥을 먹었다. 그리고 입이 심심했던 할머니를 통해서 이름과 학년과 심지어 성적까지 알게 되었다. 성적이 우수해서 얼마 전에 그 남자애 아버지가 장학금을 타기 위해 도장을 가지고 왔다고도 했다. 나는 남자애가 입는 노란 셔츠가 우스꽝스러웠다.

이월 중순이 되자 동백꽃들은 감당할 수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밤사이 가지에서 떨어진 동백꽃들을 보면 흡사 내가 알던 얼굴들이 뒹구는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백꽃들은 아침에도 한낮에도 저녁에도 시나브로 참수당하듯 툭툭 떨어져 나를 놀라게 했다. 남자애와는 아침마다 세면장에서도 만나 나란히 이를 닦고 세수를 했고 화장실 앞에서 스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에는 밤늦게 돌아오는 남학생의 기척을 미리 듣고 그 애가 철 대문을 주먹으로 탕탕 두드려 할머니를 깨우기 전에 내가 나가서 쪽문을 열어주게 되었다. 그 애는 늘 내가 공책을 덮고 잠자리에 누울 즈음인 열한 시 삼십 분경에 대문 앞에 도착했다. 슬리퍼를 끌고 다가가면 그 애의 흰 운동화가 대문 아래 들린 공간으로 보였다. 신발이 하얗게 질리며 숨을 죽이는 듯했다.

이월 말이 되자 하숙생이 다 찼다. 안채엔 네 명의 남학생이 들었고, 곁채엔 다섯 명의 여학생이 들었다. 집은 간지러움 같은 활기와 웃음소리가 넘쳤다. 밥상도 마루에 차려졌다.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다른 밥상을 받았지만 밥 먹는 시간은 같아서 그 애와 마주 보고 먹기도 하고 서로 다른 쪽을 향해 밥을 먹기도 했다. 그 무렵 자만심으로 뭉친 듯한 교만한 흰 얼굴이 나와 마주칠 때면 와락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우등생의 무미건조한 표정 아래 통제할 수 없는 들뜨는 설렘과 호의와 곤혹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연근조림하고만 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들락거리는데도 그 아이가 귀가할 즈음엔 어김없이 내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오월이 다 가고 마당의 철쭉꽃이 다 떨어졌을 무렵이었다. 대문을 열어주니 남자애는 나에게 화를 내는 듯도 하고 뭔가 호소하는 듯도 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통보를 했다. 너 때문에 공부가 안되니, 다른 하숙으로 이사를 나가겠다고.

그날 밤에 우리는 잠시 세면장 테두리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달이 누가 베어 먹다 버린 익은 감자처럼 빛도 없이 누렇게 떠 있었다. 내 몸에서 이제 막 바른 레몬 로션 냄새가 났다. 남자애가 문득 말했다. 우리 대학 같은 거 가지 말아버릴까? 제주도 같은 데 가서 고기나 잡으며 평생 살아버릴까? 그러자 그 남자애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어른같이 느껴졌고 뭔가 실망스러웠다. 그 말은 진실로부터 너무 먼 타인들의 연극 대사 같았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 남자애가 또 불쑥 말했다.

시험 치고 나면 올께. 이곳에서 꼼짝 말고 있어.

나는 이번에도 역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 역시 ≪춘향전≫ 같은 옛이야기 속의 대사 같기만 했다. 남자애는 다음날 정말 이사를 나갔다.

초여름이 되자 하숙집 담벼락엔 살찐 미꾸라지만큼이나 큰 민달팽이들이 수도 없이 기어올랐다. 비가 와서 채 여름도 되기 전에 남쪽 지방의 마을들엔 홍수가 졌고 하숙생들은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나는 그해 내내 공부가 되지 않았다. 식욕도 점점 잃어갔고 마음은 여름풀처럼 지쳐 시름시름 앓는 듯했다. 할머니의 조기구이와 배춧국과 김치, 계란프라이와 된장찌개와 미역줄기볶음, 고추부침개나 감자볶음이 계절을 이어 밥상 위에 올랐지만 지겨웠다. 나는 어김없이 아침저녁 상에 오르던 숭숭 구멍이 뚫린 연근조림에 의지해 간신히 밥을 먹었다. 연근조림만은 이상하게도 질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남자애가 어느 하숙에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 아이와 몇 달 같은 집에 있다가 나왔다는 반 친구에게 접근해 그 집에 무슨 반찬이 나왔는지,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은 친했는지, 주인 여자는 인심이 좋은지 두루 묻다가, 그 남자아이는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반 친구는 그 남자애가 공부벌레이고 집에서는 노란 셔츠를 입는 데다 구멍 난 양말을 자주 신었고 말끝마다 여자를 우습게 알고 늘 잘난 척해 밥맛이었다고 말했다.

서너 번쯤 그 낯선 골목의 이층집 대문 앞을 서성였던가, 하숙집 대문 앞의 깨밭에서 깻잎이 진한 냄새를 피우며 말라가던 가을밤에 그 남자아이가 하숙집 앞으로 찾아왔다. 외출하고 돌아오던 옆방 아이에게 전갈을 받고도 나는 나가지 않았다. 사십여 분쯤 지났을까. 남자아이가 방문을 탕탕 두드렸다. 고집을 부리다가 문을 여니 그 아이는 사정없이 내 뺨을 때렸다. 나를 때린 손을 부르르 떨더니 남자아이는 그대로 돌아서 갔다. 그 가을밤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의 비밀을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나는 왜 고집을 부리며 나가지 않았는지. 그 애는 왜 한 시간이나 기다렸는지. 왜 기다리다가 와락 들어서서는 내 뺨을 때리고 갔는지. 아니, 왜 공부가 안된다며 하숙집을 옮겨 갔는지, 나는 그해 내내 무엇을 그리도 괴로워했는지. 가끔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 애는 내가 하숙집의 다른 남자애와 빵집에 가거나 극장에 갔다고 오해했던 게 아닐까. 내가 고집을 부렸던 건 그 아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시험을 치기 전에 찾아왔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방문 역시 연극같이 이해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지독히 수줍어 꼼짝할 수 없었던 건 아닐까. 아니, 그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그저 막막했던 건 아닐까. 돌이켜 보면 지독히 아무 일도 없었던 일 년이었다. 어쩌면 대학 입시라는 끔찍한 강박에 짓눌려 감각을 철두철미하게 박탈당했던 어느 수험생의 내면 드라마였는지도 모른다.

그해가 지나간 뒤로는 다시는 연근조림 같은 것은 먹지 않는다. 가끔 가게 같은 곳에서 커다란 그릇에 높이 쌓아 올려진 연근조림을 볼 때면 음식 같아 보이지 않고 한 해 동안 내 몸에 붙어 있었던 아픈 비늘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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