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의 시간/심강우
항아리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래 곰삭은 이야기는 입을 열기 전
제 이야기에 취해 깊은 슬픔처럼 가라앉는다
이상하게도 슬픔이 우러난 빛깔은 입에 달다
제 안에 갇혀 숙성할 땐 곰팡이가 피므로
물기가 많은 사연은 자주 뚜껑을 열어 주어야 한다
침잠해 있던 내면 일기가 공개되는 순간
검거나 누렇게 붉디붉게 고조된 이야기들이
맛깔스런 소문이 되어 퍼진다
잃었던 식욕이 되살아나는 계절, 말문을 연
항아리는 명암이 갈마든 사연을 아낌없이 퍼 준다
항아리의 여유는 배가 부른 데서 나온 걸까
항아리의 입장에서 저것은 배가 아니라 얼굴일지도 모른다
어쩐지 윤기가 흐르는 표정 뒤로 배어나온
쌉싸래한 감정에 혀를 대 보는 건 다들 너무 싱겁게
살아온 까닭인지도 모른다
할 말을 끝낸 항아리는 조용히 비를 맞으며 서 있다
겉으로 봐선 아직 할 말이 많은 듯 보이는 항아리
발설을 삭히고 청각을 앉히느라 속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허옇게 뼈가 드러나는 저리 아픈 속내를 띄웠을 것이다
쉰여덟 해 청상으로 살며 장독대를 지켜온 어머니
어제도 오늘도 항아리의 안팎을 닦을 때
닦은 데를 닦고 또 닦고 닦을 때
내 몸 어딘가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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