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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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책장/한인숙

에세이향기 2026. 5. 1. 20:56

 

책장/한인숙






유리문을 통과한 빛이
활자 크기로 재단되어 책 속으로 잠입했다
빛바랜 표지를 들추자
삼국지의 용맹도 대를 물리던 국어사전도 얼룩을 물고 있다
우수수 흩어질 것 같은 문장들,
여름 지나고 가을도 지났다
가끔 들른 구름과 대륙을 건너온 먼지를 기록하는지 누렇게 버석거렸다
그 많은 활자를 먹고도 살이 오르지 않은 책벌레는
여전히 책을 탐했지만
별책부록처럼 겉도는 짧은 지식은 그저 종이에 불과했다
궁지로 밀린 것들의 위험이랄까
크거나 작은 활자들 빛을 동그랗게 말아 쥔 채 낡아갔다
인생의 사원이 되어주던 책장에 기대앉아
활자들의 원성을 들었다
실타래처럼 엉킨 기호가 소멸을 저장하는 동안
염소가 뜯어먹었을 오후의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유리문 밖 고즈넉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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