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포 나루터/김은주
강물이 긴 한 숨을 돌리고 있다.
태백 황지에서 시작한 물길은 구무소를 지나 굽이굽이 긴 여정에 든다. 그 여행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 낙동강 하구. 완만해진 강폭에 속도가 느려진 강물은 본포 나루에 닿아서는 제법 해찰을 부리며 쉬어 간다. 어디서부터 갈고 부서졌는지 본포나루의 모래는 분가루 같다. 보드라운 모래 위에 겨울바람이 스치니 촘촘히 모래주름이 생긴다. 멀리 카페 지붕위로 미루나무 한그루 우뚝 솟아 있고 그 위에 까치집이 걸려 있다. 그 아래 낡은 함석지붕이 바람에 덜컹거린다. 가지 끝에 매달린 까치집도, 흔들리는 카페의 추녀도, 다 위태로워 보인다. 위태로운 카페 저 너무 겨울이라 물길이 마른 강은 바닥을 드러낸 채 낮은 쪽으로만 흐르고 있다.
황량한 이 나루 끝에는 작은 주막이 하나 있다. 옛날 주막이 찻집이 된 이곳은 곧 헐릴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하구언 뚝 공사로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갈 위기에 놓인 이 찻집 이름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찻집의 이름마냥 세상은 참 알 수가 없다. 남아야 할 것과 사라져가야 할 것에 대한 기준이 사라진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삶 안에서 귀하디귀한 것은 속절없이 사라져 가고 사람의 건강이나 생활에 그다지 필요치 않는 물건들은 자고 나면 독버섯처럼 쏟아진다.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 무엇을 끌어안고 무엇을 우리로부터 떠나보내야 할지를 물어보지만 마른강도 아무 말이 없고 바람에 쓰러지는 갈대도 대답이 없다.
마당에 들어서니 회 칠한 벽, 낡은 나무 선반에 정글에서 왔는지 코끼리 가족이 나란히 서 있다. 제 각각 크기가 다른 네 마리 코끼리 인형은 추운 바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적적한 카페 벽을 그림처럼 메우고 있다. 빨래 줄에는 여자 속옷이 천연덕스럽게 펄럭이고 있어 숭스런 생각에 혼자 쿡하고 웃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옷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주인 아낙의 삶이 한눈에 읽혀졌다. 겨울바람에 자신의 내부를 저리 당당히 내걸어 보일 수 있는 여자라면 저 강물보다 더 속이 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굽이굽이 들춰내면 이야기 몇 자루 정도는 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무 징검다릴 건너 쪽 문 안으로 들어갔다.
손바닥 크기의 실내는 몹시 어둡다. 시골 사랑방에 모인 친구들처럼 낯선 손님의 출현에도 어색해 하지 않고 나를 일어서 반긴다. 자리가 없으니 서로 엉덩이를 든다. 나는 한꺼번에 쏟아진 시선이 부담스러워 맨 구석자리에 가 앉는다. 오십대 후반쯤 된 주인장의 첫 인상은 곰삭은 젓갈 맛이 난다. 무얼 마실질 손님에게 묻지 않는 것이 이집의 법도인가 보다. 주인아낙의 마음 가는대로 손길 닿는 대로 차를 내어 온다. 일인용 내 찻잔에는 어린 들깨 순 같은 허브차가 나왔다. 화한 맛이 일품이었다.
진흙을 발라 만든 연통 난로는 그다지 뜨겁지 않게 실내를 데우고 있다. 그 위에 마시다 만 찻잔도 올려져 있고 고구마도 익어 가고 있다. 이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작은 유리창 너머로 풍경이 달려 있어 강물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곳. 그곳에는 삼십대 후반의 남정네 여러 명이 깊은 담론에 빠져 있다. 구석에는 고구마 소쿠리, 먼지 앉은 책들, 옛 낙동강 풍경이 들어있는 흑백사진, 꾸준히 그녀가 찾아온 낙동강 주막에 대한 자료 조사한 파일들, 안경, 손수 뜬 수예품들, 자잘한 다기들, 가끔씩 통 유리 너머로 보이는 겨울 풍경이 따뜻한 실내와 다르게 액자안의 그림 같다.
그녀의 노래 한 곡을 들으러 대구에서 여기까지 걸음을 했노라고 하니 그녀는 멋쩍게 웃더니 요즘 기타는 거의 안친다며 말끝을 흐렸다. 찻물을 더 내 오더니 오디오를 켰다. 음악이 깔리고 어둡고 좁은 실내에서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울컥울컥 강물이 토해 내듯 그녀는 노래를 불렀다. 가만 듣고 있자니 장사익의 노래를 듣는 듯 혈관 사이로 스멀거리며 기어오르는 노래의 물길은 어느새 내 심장에 닿아 소름을 돋게 했다. 연달아 네 곡을 부른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흔들 흔들 돌아가다 높은음에서는 격정적으로 다시 한 번 휘 돌아치는 그녀의 노래 솜씨는 수준급이다. 몇 겁 삶의 질곡을 건너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그녀만의 독특한 발성법이다. 가락 하나하나에 회한이 묻어 있다. 스스로 내부에 쌓여있는 무언가를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듯 그녀의 몸짓 손짓이 다 격정적이다.
찻물을 몇 차례 더 우려 마셨지만 달뜬 실내 분위기 탓인지 내 입술이 자꾸 마른다. 노래를 마친 그녀는 내게 직접 쓴 시를 보여주고 주막 복원에 대해 이야기 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찻값이나 노래 값은 저마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탁자위에 놓고 떠난다.
세상 모든 일이 떠날 때 떠나고, 사라질 것은 사라져가겠지만 우리 마음에 따뜻한 물길을 흐르게 하는 본포나루는 오래 우리 일상 안에 남아 사람들의 정서를 품어 주었으면 한다. 낙동강 수심보다 더 깊게 곰삭은 한 여인네의 흥에 겨운 노래 소리가 돌아서 오는 내 귓전에 오래 공명共鳴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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