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쇠한 몸에 꽃을 피우려니 / 김은주
나이 먹은 백일홍이 술을 마신다.
일 년에 한번 거창하게 한 잔 하는 날이다. 보살님이 날 선 곡괭이로 백일홍 발치의 살을 파낸다. 둥글게 파낸 골을 따라 술이 흐른다. 흐르던 술이 서서히 스며들고 난 자리에 다시 한통이 더 부어진다. 둥근 흰 띠는 강물처럼 백일홍을 감싼다. 족히 스무 통도 넘어 보이는 막걸리가 화단가에 늘어서 있다.
저걸 다 마시려나보다. 배포도 크지. 너 댓 통 붓고 나니 가지가 부르르 몸을 턴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푸르다 못해 시리다. 가을의 끝자락이다. 득달같이 달려올 겨울이 코앞이다. 한 줄금 이는 바람에 혈관 같이 뻗은 잔가지에서 서서히 피가 돌기 시작한다. 취기가 도는가 보다. 휘청거리는 가지의 모습이 유연하다. 그리 마셨는데도 안주는 없다. 뭇 사람들의 눈길과 안주보다 더 맛깔스러운 보살님의 입담만 있을 뿐이다. 나무가 술을 마시다니, 참 희한한 일이다. 제법 낙엽 진 법당 뒤쪽에 앉아 삼백오십 살 먹은 오어사 백일홍이 저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가는 세월은 어찌 할 수 없나 보다. 백일홍도 기력이 다해 제 몸에 깃든 꽃눈조차 밀어 올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막걸리로 지금 극약 처방 중이다. 제대로 된 수혈을 받고 있는 것이다. 눈감고 있어도 가는 것이 세월이라 했던가. 어제와 오늘의 바람이 다르고 한번 핀 꽃은 지게 마련이다. 온 것이 다시 가겠다는데 무슨 수로 막겠는가? 일백년도 살지 못하는 사람에 비하자면 백일홍의 저 견딤은 참으로 장하다.
장하게 견딘 삼백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힘에 겨웠는지 백일홍은 맨 몸이다. 겨울바람을 막아줄 바람막이조차 없이 온몸에 껍질이 죄다 벗겨져 나가고 없다. 보고만 섰는데도 나조차 시리다. 겨드랑이 아래 손을 꽂고 나도 부르르 떤다. 자세히 보니 헐벗은 몸에 흰 반점이 무수히 박혀있다. 마른버짐처럼 번져간 반점들을 보며 백일홍 몸피에 쌓인 세월을 읽는다. 숱한 게절을 건너오며 싹틔우고 꽃피우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때가 되면 저절로 봄이 오가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다. 꽃 피우려 밤잠 설친 안간힘이 잎 다 버린 백일홍의 낯빛에 그대로 남아있다. 여름에야 푸른 잎과 꽃으로 어지간히 쇠한 모습을 가릴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가을의 끝, 다 벗은 몸이 지쳐 보인다. 줄서 있던 막걸리 통이 하나 둘 사라지고 백일홍 발치가 흥건히 젖었다.
젖어 다시 스며든다는 것, 소리 소문 없이 완벽하게 상대에게 삼투압 되어가는 것, 나이 들며 우연히 생긴 몇 가지 장점들이다. 그런데 마흔을 넘기고 나니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도 더러 나를 찾는다. 시시로 몸안에 찬바람이 드는 것이다. 고빼도 없이 제멋대로인 이 바람에게 나는 늘 휘둘린다. 세월이 몸에 쌓이고 보니 아무리 껴입고 앉았어도 맨 몸인 듯 시리다. 몸만 그러면 그나마 다행이다. 마음 안에서 부는 바람은 그 방향이 어디일지 가늠조차 어렵다. 체력이 바닥을 칠수록 정신은 명징하게 맑아 오고 잠이 줄더니 새벽이 좋아진다.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이는 기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저것 뜸들이고 재던 습관이 일시에 사라지고 순간 이는 감정을 가감 없이 밖으로 내 뱉는다. 말이나 모은 굼떠진 것 같은데 생각은 쫓기 듯 빨라졌다. 당장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할 것 같은 조급증이 마음 안에 바람을 부추긴다. 하루에도 수차례 마음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진다.
오늘도 바람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더니 오어사에 닿았고 닿고 보니 해질녘이었다. 휴일 한낮을 망연히 보내다 불현듯 나선길인데 이런 진풍경을 만나다니, 나와 백일홍 사이 전생에 무슨 인연공덕이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일 년에 한번 있는 넌출한 술자리를 내가 지켜 볼 수 있다니 오늘 분 바람은 제대로 분 바람인 것 같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흰 막걸리가 땅으로 스며들고 있다. 사는일도 서로 제대로 스며들어야 상대에게 가 닿을 수 있다. 스며들지 못하면 닿을 수도 없고 닿지 못하면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세상살이다. 마지막 막걸리 한통을 백일홍 발치에 다 부어놓고 잎 진 먼 산을 바라보고 서있는 보살님. 그 눈길이 우물 속처럼 깊다.
갑자기 부는 바람에 불콰해진 백일홍이 생기가 돈다. 젖더니 그새 취했는지 속절없이 흔들린다. 흔들흔들 맥 놓은 그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모름지기 사람이나 나무나 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늙음 또한 막을 수 없으니 어찌 섭생이라도 잘해 한 해라도 더 붉은 꽃을 피우려는 저 욕망들을 어찌 탓 할 수 있으랴. 보살님 혼자말로 되뇐다.
"저누무 백일홍 늙었다고 파 내 버릴 수도 없고 노쇠한 몸에 꽃을 피우려니 어쩌겠누."
"백일홍한테 이건 술이 아니고 약이여 약"
애달픈 보살님 목소리에 백일홍 파르르 떤다. 내 몸에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바람소리에도 태연하던 백일홍 귀를 모아 보살님 소리를 듣는다. 적당히 취기 오른 목소리로 백일홍 내게 말을 걸어온다.
"만화방창 호시절에 치명적인 내 붉은 꽃 보러 꼭 다시 걸음 하시게."
내 귓전에 닿는 백일홍 입김이 얼마나 달작지근한지 찬바람뿐이던 내 몸속이 순간 후끈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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