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능 陵 / 김은주

에세이향기 2021. 8. 23. 12:03

 봄날 한나절을 잘라 내어 주산에 올랐다. 바쁘게 삶의 노를 저어가다 보니 마음속 웅덩이에 괴는 것이 없다. 고여서 깊어 진 것이라야 내 것이 될 터인데 말이다. 마흔을 넘기고 나니 삶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오롯이 쌓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형해形骸같은 아지랑이 속에 옛 가야의 도읍인 고령 시내가 봄 안개 속에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다. 능을 찾아 오르는 길은 완만하고 적당히 호흡이 가쁜 산책로이다. 길 초입에 늘어선 대나무 숲에서는 오소소 소름 돋는 바람이 일고 길 따라 늘어선 배롱나무, 산수유에는 봄이 한껏 부풀고 있다. 죽음의 집을 찾아 가는 길이 이리 몽롱한 따사로움이 느껴져도 되는가? 푸르게 녹이 올랐을 오랜 시간의 발효醱酵를 찾아 지금 나는 주산을 오르고 있다. 먼데서 우륵의 가야금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좁은 산책길 끝에는 네 개의 능이 그림의 소실점을 기억해 낼 만큼 완벽한 구도로 줄서 있다. 능과 능 사이에는 휘모리장단 같이 빠르게 길이 나 있다. 물결치듯 능을 감싸고 있는 길은 메마른 능을 적시는 수액水液같아 보인다. 한껏 물기를 빨아들인 능은 임산부姙産婦의 배처럼 불룩거린다. 그 불룩한 봉분封墳위에 푸른 정맥 같이 잔디가 돋아나 있다. 봄은 이미 깊을 대로 깊어 잔디의 숨결 따라 이제 막 트인 혈血이 힘껏 돌고 있는 듯하다. 고개를 흔들어 본다. 환영幻影같은 이 풍경은 아마도 봄 아지랑이 탓인 것 같다. 능 앞에는 능의 나이와 맞먹을 만한 도리 솔이 하나씩 서 있다. 여러 그루가 아닌 나무하나 여서 그런지 그 모습이 능을 지키고 서 있는 수문장守門將같다. 옛 선인들이 따로 구상을 해서 능을 만들지도 않았을 터인데 그 절묘한 구도가 나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저 구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볼일이다. 지난 시간이 마련해 놓은 성찬 앞으로 한껏 나를 밀어 넣어 본다.

 

 천천히 죽음의 집을 둘러보고 있자니 문득 사람은 두 번 죽는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은 육신肉身의 죽음이고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정신적으로 죽는 것이다. 죽음의 가장 큰 징표로 남은 것이 능이 아닌가 생각한다. 밥술 뜨기도 힘든 평민이야 작은 봉분 하나 가지기도 힘들었겠지만 능을 죽음의 안식처로 생각한 사람은 분명 왕이나 부족장이었을 것이다. 천 오 백년이라는 세월을 비켜서서 여직 도도한 봉분을 지키고 서 있는 능이야말로 살아 있는 화석 같다. 능이 긴 세월 비바람에서도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죽음의 공간이긴 해도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품고 서러움도 보이는 듯하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 자도 있었겠지만 거부한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삶과 죽음이 종내에는 한 통속이라는 서늘한 느낌이 든다.

 

 가까이 와 능의 표면에 손을 올려 본다. 해갈解渴된 흙들이 부드럽다. 거대한 능 앞에 서고 보니 나란 존재가 참 미약해 보인다. 죽음도 삶을 목전에 두고 있어야 절실해 지듯이 무덤 곁에 서고 보니 살아있는 모든 것이 귀하게 느껴진다. 고개 내민 새싹들이 손바닥에 옴 오른 듯 간지럼을 태운다. 흙 묻은 손바닥을 가만 들여다본다. 처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죽어 갔을 그들의 숨결이 묻어나는 것 같다. 지금껏 내 삶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등 떠밀려 살아온 세월이다. 고개를 숙여 내 걸음에도 흙처럼 순하게 묻어나는 사람이 있었나? 생각해 본다. 있었다면 이참에 무덤처럼 그를 품어야 할 것이다. 사랑 하는 일도 목숨을 지키기 위한 삶의 안간힘임을 무덤 아래서 깨닫게 되다니? 가히 무덤은 이중적이다. 죽음을 표시 하는 동시에 육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포장해서 감추어 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천 오백년 전 죽음들이 걸어 나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네 개의 능을 다 지나와서는 다시 되짚어 그 길을 걸어 본다. 이 길에서 나는 산다는 것은 제 몸 속에 길을 내는 일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능이 앉은 자리는 풍수를 알지 못하는 내가 보기에도 명당임이 틀림없다. 탁 트인 시야에 사람 사는 동네가 한눈에 들어온다. 능이 국어사전의 어미처럼 왕이나 왕후의 무덤이라면 내세에서도 백성들을 굽어 살필 요량이었나 보다. 죽어서도 백성들에 대한 염려를 놓지 않았는걸 보면 공기만 드나들 줄 알았던 저 어두운 공간 안에서도 영혼들은 꽤나 자유로웠나 보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영혼은 무덤에 갇힌 저들보다 얼마나 더 자유로운가? 햇살을 머리에 이고도 결코 그렇지 못한 듯하다. 너 나 없이 사지에 감긴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묶여 있는 듯하다. 자신을 알뜰살뜰 가꾸다 보면 허공도 명당이 될 수 있다고들 하는데 그 노릇도 또한 쉬운 것만은 아닌 듯하다. 적요寂寥를 수놓으며 묵묵히 서 있는 능을 올려다보며 능 사이에서 느껴지는 훈기가 봄기운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첫 발을 내딛던 그 자리에 와서 능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능속의 어둠과 내가 몸을 섞어 보지 않은 다음에야 저 들의 역사를 어찌 알기나 할까 만은 불어오는 바람의 기운만으로도 조금은 알 것 같다. 훈풍薰風이다. 죽음 속에도 온기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 온기의 출처는 알 수 없지만 현실과 피안彼岸의 세계는 둘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도 같다. 그 둘을 경계 짓지 말고 넘나드는 여유가 우리네 삶에도 필요할 것이다. 삶에 집착하지도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사물은 그 본질을 다 드러내지 않을 때 그저 아름다울 뿐이므로. 능 또한 내게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어 더욱 생경스러운지도 모르겠데. 먼발치에서 보는 능은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무수한 말들을 내게 한다. 나는 그것을 받아 적는다. 풍경 속의 완강한 침묵이 말이 되고 글이 되는 순간이다.

 

 

*주산 - 고령 대가야 고분군이 있는 산, 지산동 고분군에서 능을 바라본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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