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칠단/김은주

에세이향기 2021. 8. 23. 12:10
칠단/김은주
 고요를 밀치며 아이가 숲에 들었다. 숲에 든 아이는 잡목 사이 낭자한 칠단풍의 혈흔에 홀려 제 몸에 드는 붉은 물은 모르는 듯하다. 습자지에 꽃물 번지듯 아이 등에 스며드는 저 환한 빛깔. 그 붉은 빛에 잠시 현기증이 인다. 아이가 숲에 든 것은 알밤을 물어 나르던 청솔모를 보고서다. 혹 청솔모가 놓친 밤이라도 있나 싶어 숲 안으로 들었을 터인데 가을 숲은 금방 아이를 삼키고 만다. 숲은 아무 기척이 없다. 미동도 없는 숲을 응시하며 아이의 머리가 어디쯤서 떠오를까 꼼짝없이 바라보고 섰다. 보이지 않으니 만질 수 없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소리를 따라 시선만 물 흐르듯 숲을 쓰다듬고 있다. 해가 지도록 산을 돌아 다녔으니 배고플 법도 한데 아이는 쉬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팽팽하게 아이에게로 당겨져 있던 시간의 고삐를 놓치는 순간 넘어지고 깨어지는 사고가 생겼다. 그 분리의 불안감을 견디지 못해 보일 리 만무한 내 마음의 말뚝에다 아이를 묶어두었었다. 아이가 말뚝 주변으로 그려진 동그라마 안에 있을 때만 나는 평온을 느꼈다. 그 평온이 아이에게는 어떤 부담일지 모르면서 말이다. 배가 고프면 고달을 내는 아이다. 한번 낸 고달은 내 진을 다 뺀 후에야 거둔다. 그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홍시를 손에 들고 아이의 그림자를 찾는다. 그런데 선홍의 칠단 숲은 오래도록 아이를 머금고 뱉을 줄 모른다.
 
 길어진 기다림에 신발을 벗고 벤치에 앉았다. 작게 구멍 난 양말을 버리기가 뭐해 두어 바늘 꿰매 두 장 겹쳐 신었더니 그 꼴이 우습다. 발가락이 움직일 때 마다 양말 안에서 느껴지는 바느질 자국, 사라진 아이의 흔적을 찾아 눈으로는 숲을 훑어 내리며 발가락으로는 양말의 상처도 함께 쓰다듬어 본다. 자식도 내 살갗 속에 숨겨진 흉터 일지 모른다. 때로는 힘에 부쳐 시야에서 떼 내놓으려 해도 끊임 없이 눈앞에서 출렁이는 존재, 너무 살 속 깊이 박혀 쉬이 파내 버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자식일 것이다.
 요 며칠 아이는 전에 없이 움직임이 둔해졌다. 말수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수시로 몸을 씻는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 찝찝해서 그런다지만 씻고 나온 아이의 엉덩이는 잘 익은 수밀도마냥 맑고 투명했다. 근데 그 모습이 참으로 낯설었다. 이미 호르몬의 장난이 진행된 듯한 통통한 몸에서는 금방이라도 생명의 발아가 이루어질듯 묘한 조짐이 느껴졌다.
 
 내 나이 열다섯, 그 겨울의 끝이었다. 시린 논이 진저리치며 제 살 속에 살얼음을 만들 때 나는 왠지 등짝에 찬물을 끼얹는 듯 한기가 들었다. 어찌나 춥던지 목단 꽃 솜이불을 코까지 끌어 덮고 엄마께 불구멍을 활짝 열라고 성화를 부렸다. 자꾸만 아파오는 배는 화장실에 다녀와도 개운치 않았다. 끓어오는 아랫목에 반듯이 누워 무죽한 허리아래 손바닥을 넣으니 낭창하게 느껴지는 엉덩이의 무게가 전에 없이 오졌다. 아랫배에 바늘을 박고 문신을 뜨는 듯 통증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꽃 문신을 새긴 듯 얼굴에는 열꽃이 피었다. 천정에 그려진 육각형의 벽지무늬를 세다 갑자기 제 철도 아닌 홍옥이 먹고 싶었다. 시큼한 사과 한 알 먹고 나면 금방 아픈 배가 나을 것 같았다. 굳이 사과만 먹고 싶다고 하니 그 밤중에 집을 나선 엄마는 실금이 툭툭 간 국광 몇 알을 구해 오셨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손가락 사이에 과즙을 흘리며 찬 사과 한 알을 다 먹고 나니 엎드려 있던 옥양목 이부자리에 목단 꽃보다 더 붉은 꽃물이 들어 있었다.
 
 내 유년의 꽃물을 헤치며 칠단 숲 사이로 아이의 머리가 나타났다. 대관절 숲을 어떻게 헤집고 다녔는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나타났다. 주먹 쥔 손을 흔든다. 그러고는 단숨에 나를 향해 뛰어 온다. 청 보리 씨눈 같은 아이의 웃음이 좀 전의 염려를 말끔히 씻어 간다. 숲이 갑자기 환해져 온다. 마음껏 벙그는 아이의 탱탱한 앞가슴이 얇은 셔츠위에서 흔들린다. 숨을 몰아쉬며 다가온 아이는 주먹 쥔 손을 내 앞에 펼쳐 보인다. 알이 실하게 들지 않은 쭉정이 밤 몇 톨이다. 알들일 채비를 시작한 제 모습 같은 밤에다 아이는 나뭇가지를 꽂더니 국자를 만든다. 국물을 퍼는 시늉을 한다. 제 입으로 가져가 마시기도 한다. 오늘 따라 뒤로 젖힌 목선이 더없이 도톰하고 예쁘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앉은 아이의 몸에서 살구씨 냄새가 난다. 달짝지근한 향내는 내 콧속으로 들어와 오래 동안 맴돈다.
 
 칠나무 가지에 걸렸는지 목에 회초리 맞은 듯 붉은 줄이 그어졌다. 알러지가 심한 아이는 사정없이 긁어댄다. 긁던 손을 멈추고 배가 고픈지 산을 오를 때 사온 홍시에 손이 간다. 홍시의 마른 꼭지를 딴다. 배꼽을 버린 홍시는 금방 아이의 손에서 반으로 갈라진다. 양손에 감을 든 아이는 반쪽을 내게 내민다. 나눌 줄 아는걸 보니 많이도 자랐다. 수만 번 봄이 다녀갔을 마른꼭지가 처연히 내 발치에 떨어져 누웠다. 꼭지를 보고 있자니 내 몸에서 생명을 받아 떠나간 아이의 배꼽이 생각난다. 잘 아물지 않고 덧나 내 애를 태우던 배꼽, 그 진물이 끈끈한 집착이 되어 내안으로 더욱 아이를 끌어안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이제 내 눈썹까지 차오른 아이의 키를 보고 있자니 나의 말뚝이 그다지 필요치 않아 뵌다. 시울이 크렁해진다. 분리의 순간이 도래한 모양이다. 머지않아 칠단도 가지를 떠날 것이다. 가지를 버리는 순간부터 잎사귀는 본능 속의 자연성으로 자가발전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신성한 독립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니까.
 
 수액이 차단 된 후 칠단은 더욱 낭자하게 붉다. 곱다고 쓰다듬다 보면 온몸에 옻이 오른다. 낮에 스친 칠단독이 밤이 깊을수록 아이 몸을 휘감는다. 견딜 수 없는 가려움에 아이의 몸이 요동을 친다. 애끓는 안타까움에 등짝을 긁어본다. 봄 논에 싸락눈 들이치듯 파닥이며 몸을 뒤집는다.
 
 순간, 열세살 딸아이 황토 홑청에 칠단 보다 더 붉은 꽃물이 배어났다. 아이는 이제 막 붉은 씨방하나 가슴에 품고 제 꽃물 위를 걸어 총총 내 곁을 떠나가고 있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웃기 돌 / 김은주  (0) 2021.08.24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박월수  (0) 2021.08.23
절구불佛 / 김은주  (0) 2021.08.23
능 陵 / 김은주  (0) 2021.08.23
활/김은주  (0) 2021.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