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내 머리위의 자화상/윤혜주
도끼빗을 들고 거울을 본다. 푸석하게 언 땅 같은 머리위에 널브러져 누운 반백의 머리를 만난다. 메마르고 거칠어진 내 삶의 흔적이다. 굵은 빗살이 머리 밑 깊숙이 들어가 부실한 뿌리를 일으키려 애써보지만 서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드라이기의 뜨거운 열기를 들이댄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던 머리카락이 뽑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내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애처롭다. 저 황량한 산등성이 어디쯤에 나는 서 있는 것일까.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화장대 서랍을 연다. 손을 넣어 까만 봉지 하나를 꺼내들고 망설인다. 헤어보톡스(가발)다. 작년 봄, 단짝인 친구가 숭덩숭덩 비어가는 내 머리 밑을 걱정하며 그것을 권했다. 몇 번 손사래 치며 거절했지만 또래들보다 늙어 보인다는 말에 용기를 냈다. 그런데 왠지 금지된 물건을 몰래 산 기분이 들어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는 잊고 지냈다. 어느 날, 중요한 자리에 나가는 친구가 숱이 없는 머리 걱정에 밤잠을 설쳤다는 얘길 듣고 빌려준 것이 외출의 시작이었다.
이사람 저사람 머리위에서 멋 맞추느라 고단했던 모양이다. 축 늘어진 헤어보톡스를 선잠 깬 아이 요강에 앉히듯, 툭툭 털어 머리위에 얹어 본다. 여자에게 자신감을 더해주는 마법 같은 물건이라며 극찬하던 친구 말대로다. 물결치듯 풍성한 자연갈색의 웨이브가 머리위에서 출렁인다. 내 세울 것 없는 미모가 한층 돋보이지만 겉으로만 탐스럽고 아름다울 뿐이다. 코끝에 걸려 향기롭고 손에 잡혀 촉감이 좋았던 오래전 내 머리위의 숲은 아니다.
숲을 가꾼 것은 꾸밈과 질박함이 조화를 이룬 어머니의 투박한 손이었다. 까까머리 아들 다섯을 내리 낳은 뒤 어머니는 느지막이 얻은 딸의 머리 만지는 잔재미에 빠져 살았다. 내 소유지만 실제 당신의 것인 양 장날이면 하나, 둘 사다 모은 핀과 머리띠가 야금야금 어머니의 빗접을 점령했다. 양지바른 장독대 옆이라도 좋았고 온기 남아있는 아궁이 앞이라도 좋았다. 나는 어머니가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 무릎위에 머리를 내주고는 잠이 들었다. 그때마다 자분자분 태고의 신비한 숲을 뒤져 몰래 자리 튼 서캐를 찾아내고 콧노래 섞어 참빗 곱게 빗어 주었다. 그때 내 머리위의 숲은 꽃피고 새우는 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부드럽게 찰랑이던 긴 머리를 자르고 단발머리를 했다. 어머니는 고무줄 대신 가위를 들고 게슴츠레한 실눈으로 귀 밑 삼 센티 길이를 고르느라 노심초사 했다. 수많은 어머니의 손길이 머물다 간 숲은 더욱 푸르렀고 내 영혼은 그 속에서 참으로 안온했다.
풍부한 자양분과 푸른 빛 이끼 품은 숲을 시샘이라도 했을까. 숲을 노리는 불청객은 서캐만이 아니었다. 얼굴에 허연 버짐이 생겨 번져나가더니 정체불명의 종기가 머릿밑을 덮었다. 좋다는 약을 구해 바르고 먹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약을 바르고 진물에 엉킨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숲이 사라진 자리에 숭덩숭덩 패이고 일그러진 흉한 민둥산이 드러났다.
동네 가까운 문중 산에 불이 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수십 년 된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울창한 숲이 사라지자 문중의 큰 어른이셨던 할아버지는 몸져누웠다. 그 바람에 까만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볼이 부어 다니는 내게 누구하나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무지갯빛 꿈을 꾸던 내 머리위의 숲도 새까만 문중 산의 사라진 숲도 깊은 시름에 잠겼다.
자연의 섭리란 때를 그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봄이 되니 잿더미 속에서 새싹이 나왔다. 말라버린 나무 등걸에 새 순 틔우듯 흉하게 일그러진 내 머리에도 머리카락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부드럽고 윤이 났다. 어머니는 다시 고무줄과 빗을 들고 딸의 머리를 묶고 땋느라 분주했다. 잠시 멈추었던 엇박자 콧노래 가락도 다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오랫동안 고무줄에 묶여있던 머리가 풀렸다. 기다렸다는 듯 숲은 변화의 물결로 넘쳤다. 볼륨 있게 출렁이던 긴 머리틈새로 밝은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태양마저 눈부시게 했다. 그 속에는 젊은 힘의 긴장과 이완이 있었다. 내 일생 가장 아름다웠던 숲의 풍경이었다. 바야흐로 햇살 가득한 울울창창한 여름 숲이었다.
아름다웠던 숲의 시절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파머를 하고 멋 내기 물을 들이면서 까칠하니 윤기를 잃어갔다. 그 바람에 독한 화학성분에 덮여 신음하는 숲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연이은 출산과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살면서 쏟아 부은 에너지도 고갈되었다.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자양분이 빠져나간 푸석한 머릿결이었다. 덩달아 기름지고 단단했던 표피도 건조해졌다. 균열마저 생기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새치가 술래처럼 숲에 숨어들어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새벽서리가 앉은 듯 하얗게 새치가 늘어났다. 새치는 부딪히면 잠깐 일어나 반짝거리다 곧 숨어버리는 부싯돌 같았다. 나는 너무 일찍 찾아온 그 참을 수 없는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틈나면 뽑아냈지만 그럴수록 더욱 빤짝거리며 나타났다. 새치와의 한 판 승부에 염색약을 택했다. 잠깐 주춤하는 듯 보였다. 그러자 머리 밑에서는 또 다른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탈모였다. 하나, 둘 빠지기 시작하던 머리카락은 구부러진 틈새에 박힌 못처럼 맞물리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아직 가을은 저만치 있는데 숲에는 벌써 때 이른 낙엽이 지고 있었다.
여자에게 숲의 의미는 뭘까? 어쩌면 단순히 미모를 돋보이게 하는 외면의 형식이 아닌 내면의 풍경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애면글면 달래고, 얼러가며 매달리는지도. 이제는 내 머리위의 숲에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다. 덩그렇게 밑을 드러낸 반백의 머리에서 도망도, 방관도, 부딪힘도 없이 그저 순리에 순응하리라. 쌓아두었던 염색약도 탈모제도 버린다. 색을 입히고, 약을 먹고 헤어보톡스를 뒤집어쓰면서 땀 흘린 시간들의 잔해도 내려놓는다.
살아있는 것들 모두 시간이 흐르면 생기를 잃어 가듯, 나이 먹음 또한 어제와 오늘의 차이일 뿐이었다. 조바심내고 안달한 것은 언제나 마음이었지 몸은 아니었다. 푸석해지고 거칠어진 삶의 흔적도 다 내 것이다. 찾아오는 그것들을 부정할수록 더 두툼한 삶의 이물질만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을 왜 몰랐을까. 그것들은 거부하고 긁어내야 할 각질 같은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숨죽여 함께 가야할 동반자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다시 빗을 들고 거울을 본다. 빗을 것도 없는 숲은 이제 소유가 아닌 비움이라는 향기에 젖어 있다. 오래전 보았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눈 내린 자작나무 숲처럼 하얗게 빛난다. 사라진 내 숲의 색과 무게를 추억하는 일은 반야심경을 외는 가슴만큼이나 처연한 일이지만 쓸쓸하지는 않다. 밤이 깊을수록 함박눈이 내리고 내 머리위의 숲은 더욱 희어질 것이다. 어둡고 까마득했던 것을 벗고 아름다운 순백으로 빛날 것이다. 그러면 고즈넉해진 숲만큼이나 내 삶도 더 심오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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