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달래다 / 김현숙
물이 끓는다. 차(茶) 한 잔이 되기 위해 물은 지금 뜨거운 주전자속에서 제 살을 뜯고 있다. 가혹한 끓는점에서 사정없이 부서지고 있다. 상처투성이가 된 물을 찻잔에 부어놓고 후우, 후우, 입김을 불어 달랬다. 나는 그렇게 찻물을 달랜다. 알맞은 온도도 없고 따라야 할 다도(茶道)는 더욱 없다. 입 바람을 타고 물결이 켜를 지으며 찻잔 벽에 가 부딪혔다. 늙은 찻잎은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잔결 사이를 파고들어 물의 깊은 속살까지 찢어놓고 수몰되어버렸다. 그 갈라터진 살갗에 신록 빛의 새살이 차면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다.
[찻물을 달래다] 지난겨울, 나는 모처에 있는 찻집에서 이 문구를 처음 봤다. 흰 광목천으로 만든 조각보에 주인을 닮은 글씨체가 수(繡) 놓여있었다. 주인 여자가 인사말 대신 청자색 보자기를 다탁에 얹으며 난처한 얼굴로 내게 기다려 주기를 청했다. 물이 떨어졌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소량의 찻물을 받아 놓긴 했으나 그 일이 채 한 시간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설핏 이곳이 그러한 곳이라는 귀띔을 지인이 하긴 했어도 설마 내 경우이겠나 싶어 태무심 했었다.
물 시간을 잘못 맞춘 값으로 기다려야 했지만 나는 싫지 않았다. 주인 여자가 두고 간 파란 보자기를 가슴 쪽으로 당겼다. 간소하지만 흔치않은 모양의 차림표였다. 안내책자처럼 만들어 놓은 그 보자기 안에는 찻집의 내력이 하얀 자수사로 수 놓여 있었다. 아까 조각보에서 본 것과 같이 정갈한 글씨체였다. [물의 흠집을 처음 마주한 날, 물이 찻잎을 우려내는 것이 아니라 찻잎이 물의 상처를 보듬는다는 것을 알았다]로 시작되는 말이, 이 집의 차 맛뿐 아니라 사람까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어떤 여자일까.
감색 셔츠에 그보다 조금 더 물이 간 치마를 한 벌처럼 차려입은 여자는, 말없이 찻물이 담긴 돌그릇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뻤다. 조금 전에 본 문구를 연상하자면 여자에게서 새벽 습기 같은 우수가 느껴졌다. 한 번씩 내 쪽을 바라보며 맹물처럼 웃을 땐 낯빛이 더욱 애잔하게 보였다.
그날 그녀는 시간 쓰게 해서 미안하다며 ‘첫물 차’를 내주었다. 눈앞에 가득한 연둣빛 어린잎들을 보니 입속에 침이 고였다. 나는 우전은 경험이 적은 편이다. 귀한 만큼 비싸기도 하지만 사실은 어린것이 무슨 대단한 맛을 내겠나 하는 빼딱한 선입견이 있다. 떨떠름해하는 내 표정을 봤는지 여자가 “엽차도 물만 잘 달래면 우전만 해요”했다. 내가 차에 대해 모르긴 해도, 엽차 맛이 우전과 맞먹는다는 소리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지런하게 끓은 그녀의 무릎은 인생 묘수를 가르치는 듯 단호했다. 여자의 몸놀림 속에 선인의 몸짓이 포개져 있었다. 찻물이 들어있는 숙우를 살며시 내 쪽으로 밀면서 대뜸 물을 달래보라고 했다. 방금 탕관에서 떨어진 물은 물결까지 그리며 하느작댔다. 나는 여자의 눈을 읽으면서 습관적으로 그릇을 받쳐 들었다. 숙우를 든 손이 떨렸다. 울렁대는 물 때문에 손이 떨리는지, 긴장한 탓에 찻물이 흔들리는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내 떨림이 그대로 찻잔에 전해져 파란이 일었다.
“그만 내려놓으세요.”
숙우를 탁자에 내려놓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찻물이 잠잠해졌다. 손에 쥐고 있을 땐 끊임없이 흔들리던 것이, 내려놓으니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여자는 멸 말없이 그 물을 다관에 따랐다. 이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늘어났다 당겨졌다 하며 물선을 그었다. 예순이 넘은 여자의 찻물 다루는 솜씨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미련 둘 것 없어요. 흔들린 물은 이렇게 다관이나 예열하면 되죠.”
한 번씩 툭 던지듯 하는 어법 또한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그녀는 찻물에 대한 자기의 소신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는 푸른색 차림표에 수 놓여있던 물의 흠집에서 시작되었다. ‘물은 늘 상처와 한몸인 것처럼 아무런 표시가 없어요’ 여자가 말끝에 숨을 뱉었다.
‘물은 서로 부대끼며 흐르다가 서로에게서 상처를 받아요. 또 떨어지는 폭포물이 겪는 고통은 가늠조차 할 수 없지요.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말간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누구의 말처럼 그 물이 다 눈물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그녀는 녹차 끓일 물은 상처부터 먼저 달랜다고 했다. 물을 두어 시간 전에 미리 받아두는 일도, 끓인 물을 미지근하게 식혀 쓰는 것도, 그녀에겐 모두 물을 달래는 일이라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물’은 무엇의 다름일까. 나는 그녀가 말하는 물의 상처에 대해서 생각했다. 물 입장에서 보면 내 시커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상처 입는 일은 아닐지…. 너는 왜 그렇게 뜨거웠냐. 그럼 너는 왜 그토록 차가웠냐. 서로가 어긋나면서 생긴 진창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대끼며 흐르다가, 혹은 끓다가 입은 상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그 흉터는 어떻게 달래야 하나. 애석하게도 내 속에는 물을 달랠 신경이 없다.
“끽 다 거.”
내 골몰을 깨고 수면위로 튀어 오른 말, 그저 차나 한잔 마시라는 소리였다. 그녀는 특유의 몽환적인 호흡으로 제 속의 물을 길어 올렸다. 다기를 받쳐 든 손등과 앙상한 팔목 위에 시퍼런 핏줄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내상으로 멍든 물이 혈관을 따라 꿈틀거렸다. 저 물이 그녀의 체내에 머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밀이 필요했을까. 은밀하고 숭고한 여정을 마친 옥빛 핏물이 내 찻잔에 수혈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건네준 찻잔을 서둘러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마음이 몹시 흔들렸기 때문에 잔을 손에 쥐고 있을 수 없었다. 한참을 찻물만 응시했다. 물은 찻잔 속을 천천히 돌면서 잔결을 가라앉혔다. 내려놓으면 저절로 고요해지는 것이 ‘달래는’일임을 나는 그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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