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몌별 / 황선유

에세이향기 2022. 1. 20. 10:58

몌별 / 황선유

온통 붉은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벌겋게 물든 바다와 하늘과 그 경계에서 타는 햇귀. 달리 말이 없으니 일출인지 일몰인지조차 모른 채, 망아의 일순간. 시선을 타고 들어온 붉은 바닷물이 심장의 피와 섞여 전신을 붉혔다. '붉다'를 잇는 다음은 필시 '유혹'일 터. 무어 확답도 없이 바삐 길을 나섰다.

 

막상 당항포의 일몰은 시시했다. 순천만의 장엄함과는 한참 멀다. 채석강의 홀림도 다대포의 아련함도 아니다. 색도 힘도 반이나 잃은 햇발은 쓸데없이 길어 성가시기만 하다. 썰물로 잦감이 된 개펄에 조개껍질만 듬성하다. 저만치 나앉아서 해안도로와 멀어진 바다가 겉만 불그스름하여 아쉬운 일몰의 면치레를 한다. 열린 차창으로 물바람이 좀 낫다.

 

죽 이어진 해안길의 상수리나무들이 헐벗었다. 다옥했을 산자락도 수척해지고 한 계절 내내 살피꽃밭의 꽃들을 사열했을 고샅길도 허허롭다. 가을이 깊다 못해 그만 늙어 있다. 늙은 가을을 보는 것은 현란한 백화점 거울에서 붉은 기 가신 내 얼굴 만난 만큼이나 짠한 일이다. 얼른 길가 카페로 들어갔다. 횟집과 카페가 붙어있다. 기다렸다는 듯 실비 바르탕의 노래가 빈 카페를 메운다. 뜻밖으로 <라 마리짜 강변의 추억>. 시골 한적한 바닷가 이곳에서 그 추억의 노래를 듣다니. 노래가 다 끝날 무렵에다 주인이 나타났다. 옆의 횟집에서 일하다 온 차림이다. 능숙하게 커피 한 잔을 뽑아낸다. 잠깐의 생선 비린내 걱정을 덜었다.

 

때로, 별것 아닌 것들을 별것처럼 기억해 내곤 한다. 남편의 표현에 의하면 "아무짝에도 씰데없는 것"들만 기억하는 것이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하는 것이, 평소에 따로 마음에 두는 것도 아니거니와 생전 한번 짚어 본 적도 없던 과거의 어떤 일들이, 어쩌다 그와 맞갖은 상황을 만나면 별안간 영상을 보는 듯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선택적 사고selective thinking가 내게도 엄연하겠지만 어떻든 그렇다. "망각은 신의 배려." 잘생긴 도깨비가 나오는 드라마의 대사 한마디가 귀에 꽂힌다.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솔가울 때는 신의 배려가 아쉬울 따름이고, 그 기억이 내 글의 질료가 되어 줄 때는 신의 배려가 되레 두려울 뿐. 지금도 그 갈팡질팡한 양가감정을 양손에 들고 신 앞에서 불온하게 저울질하고 있다.

 

군 복무 중이던 큰아들이 상병쯤 되었을 때이다. 각 입대한 병사의 아버지가 보냈다는 편지를 보여주었다. 겉봉의 주소가 부산의 구포 어디이다. 군에 간 아들에게서 선임병이 동향이라는 말을 들었음이리라.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손글씨가 세로로 줄이 그어진 편지지 두 장을 꽉 채웠다. 어떤 날에 어떤 맞갖은 상황이었는지, 나는 목소리까지 촉촉해가며 그 편지 이야기를 들먹였다.

 

"엄마, 수필 말고 소설 쓰는 게 어때요?"

큰아들은, 무순 이등병의 편지도 아니고 병사의 아버지가 왜 자기에게 편지를 썼겠느냐며 퉁바리다. 나는, 그토록 감동적인 사건을 기억조차 못하는 내 아들을 생경히 여길 새도 없이 새 며느리 앞에서 체면이 안 섰다. 남편도 한통속이다. "실데없는 말 꺼낼 때부터 그럴 줄 알았다."

 

기억하여 간직하는 것으로 치자면 감히 당황포에 비할까. 이곳의 해전에서 왜적과 싸워 이긴 명장을 사백 년이 넘도록 고이 기억하고, 먼 소가야의 고분들을 양지바른 곳에 두어 돌보며, 그보다 오래고 낯선 백악기의 공룡 발자국도 여태 간직하는 당항포, 그러는 그대가 행여 나 다녀간 흔적을 기억해 줄 터인지.

 

나는 내 기억을 사랑한다. 시간에 잘 절여져 숨죽인 기억들, 미색으로 덧칠하지 않는 날것들, 흑백사진처럼 고요한 것들, 내 글의 질료가 될 숙명의 때를 기다리는 하염없는 것들을. 오늘 또 하루의 기억을 저장하여 숙성시킨다. 온통 붉은 사진 한 장의 유혹, 당항포의 시시한 일몰, 물바람, 수척한 산자락, 늙은 가을, 빈 카페의 그때 그 샹송. 별거 아닌 것들이 별거 되어 그득하다.

 

깝북 해가 졌다. 박모의 어스름에 그대는 왜 내 얼안에서 서성이는지. 나는 왜 떠나야 할 곳에서 지칫거리는지. 당항포와 작별한다. 함께 떠나는 자동차의 걸음도 천천하다. 몌별이다. 소매를 부여잡을 못내 아쉬운 인연이다. 살아있는 한은 그러하려니. 그대 잘 있으오. 기약은 못 하나 살다보면 어느 때 일출을 보러 올 날이 또 있을는지.

 

생은 이렇게 매 순간이 몌별이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한 그루를 읽는 동안 / 최지안  (0) 2022.01.22
마늘 까던 남자 / 민 혜  (0) 2022.01.22
시간을 읽다 / 박종희  (0) 2022.01.20
숨비소리 / 김미향  (0) 2022.01.19
물을 달래다 / 김현숙  (0) 2022.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