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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지게/문태준

에세이향기 2022. 1. 22. 11:54

지게/문태준

 

나의 아버지는 평생 지게를 지셨다. 지게를 벗은 적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에게 지게는 등짝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게를 업고 다니셨다. 논과 밭과 산과 하늘을 업고 다니셨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땔나무를 지고 돌아오셨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풀짐을 지고 돌아오셨다. (풀짐을 지고 돌아와 풀더미를 부려놓으면 저무는 내내 울안에는 동실한 풀냄새가 흘러넘쳐났다!) 빈 지게를 지고 나가셨다 봄과 가을과 겨울을 지고 돌아오셨다. 골짜기 깊은 곳에 들어가셨다 소낙비와 검은 구름과 눈보라를 지고 오셨다. 지게에는 늘 뭔가가 실려 있었으므로 지게는 포만(飽滿)했다. 흘러넘치도록 가득가득 차 있었으며 묵중했다.

 

 

지게에는 낫과 도끼와 톱과 삽과 괭이와 써레와 쟁기 등속이 실려 있었다. 가끔 멀리 가실 때에는 일을 하다가 잠깐씩 쉬면서 드실 음식인 새참이 실려 있기도 했다. 새참이래야 밥과 반찬 두어 가지가 전부였다. 그 지게에 연장을 싣고 나가서 아버지는 뒷도랑을 파고, 논에 물이 괴도록 논두렁을 만들고, 골을 타 두두룩하게 두둑을 쌓고, 씨앗을 심어 흙으로 덮고, 억센 풀을 뽑고, 터진 둑을 새로 올리고, 소에게 먹일 꼴을 베셨다. 아버지의 일일(日日)은 봄볕과 우레, 장마, 땡볕, 돌풍, 휘몰아치는 폭설 아래 있었다.

 

 

아버지는 소년 때부터 지게를 지셨다. 장정이 되셨을 때에는 땔나무를 지고 김천 시내에까지 가셨다. 이십 리 길을 지고 가 내다 팔고선 다시 걸어 돌아오셨다. 땔나무를 팔아 양식을 구해오셨다. 돌아올 때면 몸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고 어느 날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며 매일 아침 온 대지를 진 듯 육중한 짐을 지고 집을 나섰을 아버지의 그 곤경을 생각했으나 아버지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한 안색이셨다.

 

 

열다섯 살 무렵 아버지의 지게를 몰래 지고 나간 적이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지게를 지고 땔나무를 하러 뒷산으로 가기로 한 날이었다. 처음엔 호기심과 의욕에 기세가 등등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게는 아버지의 몸에만 맞춘 것이어서 내겐 알맞지 않았다. 지게 멜빵을 어깨에 메었지만 한참 남아돌았다. 몸 안쪽으로 멜빵의 줄을 바짝 죄어 지게를 등짝에 얹었다. 지게의 키도 내겐 컸다. 짚으로 짠 등태가 등짝에 닿았으나 우툴두툴한 돌들이 꽂혀있는 듯 등짝이 불편했다. 아무튼 지게를 지고 뒷산으로 가 산 밑에 받쳐놓고 땔나무를 했다. 해가 어둑어둑해졌을 때 땔나무를 지게에 실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고 일어섰다. 좌우가 기우뚱한 것은 물론 곧바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땔나무를 한참 덜어낸 다음에야 비칠비칠하면서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특해하실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짧고 근엄했다. “다신 지게질 마라.”

 

 

아버지는 지게를 집채 쪽으로 받쳐놓지 못하게도 하셨다.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지게를 집채 쪽으로 받쳐두면 집을 떠메고 간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살이에 조그마한 궂은일이라도 생기지 않도록 조심조심 마음을 쓰시는 동네 어른들 사이에 생긴 어떤 믿음 같은 것이었다.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은 나는 혹시라도 지게가 집채 쪽으로 받쳐 있으면 그것을 산 쪽을 향해 받쳐두곤 했다. 그러면 정말이지, 산의 숲이 바람에 더 요란하게 술렁거리고 산새들이 화들짝 놀라 어둠속으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네 번째 시집 《그늘의 발달》을 펴내면서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 짐 가득 지게를 진 아버지가 굴을 빠져나와 혹은 길가 비석 앞에서 지게를 진 채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아 잠시 잠깐 숨을 고르시던 게 생각난다. 시집을 내자고 여기 숨을 고르며 앉아 있는 나여. 너는 얼마나 고되게 왔는가. 아버지께 이 시집을 바친다.” 시 짓는 일을 지게 지는 농부의 고단함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시 짓는 일로 내 몸이 아버지의 등짝처럼 굳은살로 딴딴하게 되고 만다 할지라도 이 지게질은 가업을 잇듯 후회 없이 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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