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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박후기

에세이향기 2022. 1. 22. 12:14

먹물/박후기

 

 

 
 
 

 

먹물을 품고 사는 건, 문어나 낙지나 오징어나 인간이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그 쓰임새는 많이 다르다. 오징어나 문어는 놀라거나 성이 나면 먹물을 뿜는데, 이는 포식자의 시야를 가리는 연막 효과는 물론이고 포식자의 후각이나 미각 등 전반적인 감각기능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의 먹물 쓰임새는 다르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특히 우리나라 현실에서 먹물은 아주 비열하게 쓰인다.
 
 
흔히 공부깨나 한 사람을 보고 먹물 좀 먹었다는 말로 빗대곤 한다. 가방끈이 길다는 말과도 한통속인데, 먹물 좀 먹은 것과 끈이 긴 것으로 치자면 바다에 사는 문어나 낙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먹물 티를 내고 가방끈을 논하는, 이른바 ‘끈 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재단하는 자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
이 먹물 좀 먹은 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며 일반 서민보다 우월적 지위에 놓여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입만 열면 국방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석연찮은 이유로 자신과 자제들의 병역을 면제받은 자들, 민족의 자존과 역사의 심판을 거론하며 친일 반역 행위와 역사 왜곡을 정당화하는 자들, 수만 년 멀쩡하게 흘러온 강을 콘크리트로 도배질해놓고 친환경을 외치는 자들이 누구인가? 모두 먹물 좀 드신 분들이다.

 

먹물 좀 드신 분들을 지칭할 때 쓰는 먹은 사실 문어나 오징어, 낙지의 그것과는 다르다. 먹(墨)이라고 하여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서사(書寫) 용구이다. 먹은 그을음과 아교, 향료 등을 배합하여 만들어진다. 먹을 만드는 주요 성분은 극히 작은 탄소 입자로 고대에는 소나무를 태워서 생긴 소나무 그을음을 사용하였으나, 요즘엔 인쇄 잉크나 고무 타이어, 석유 등을 태운 그을음을 사용하기도 한다. 먹을 만들 때는 반드시 아교를 사용해 응고시키는데, 이 아교는 동물의 가죽이나 연골을 삶아낸 즙으로 만들기 때문에 냄새가 좋지 않다. 그래서 먹에 향료를 섞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먹을 보관할 때 습도가 높은 곳에 두면 곰팡이가 생기거나 썩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먹물들도 먹의 성질을 그대로 닮았다는 게 희한할 따름이다. 먹물들은 파벌을 형성해 모여 있거나 고여 있기를 좋아하므로 당연히 썩을 확률이 높다. 원재료가 아교이다 보니, 그들 관계의 끈끈함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디 그뿐인가? 돈 되는 일에만 들러붙는 끈적거림이야말로 먹물들의 공통 덕목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먹의 특성을 간파한 중국 서진(西晉) 때의 학자 부현(傅玄)이란 자는 일찌감치 근묵자흑(近墨者黑)을 말했느니, 먹물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도 검게 물들게 되므로 먹물을 경계하라는 충고를 후세에 남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물전을 망신시키는 대표 어물인 꼴뚜기 또한 덩치는 작을지라도 먹물 좀 품고 있는 놈이렷다. 어쨌거나 어물전이든 인간 사회든 늘 그놈의 먹물들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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