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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칼/김경후

에세이향기 2022. 1. 22. 12:06

쌍둥이칼/김경후


아줌마들이 쌍둥이칼이라 부르는 칼이 있다. 원래 이름이 헨켈이고, 독특한 공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정보는 아무 소용 없다. 태양은 하루 한 번 뜨지만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는다. 끼니 사이사이엔 간식을, 그리고 달이 뜬 후엔 야식을 먹는다. 쌍둥이칼이든 쌍칼이든 일단 들고 썰고 자르고 다져야 한다. 끼니는 가끔 거를 수 있지만 끼니 만드는 걸 거르는 건 곤란하다. 곧 다음 끼니가 닥쳐온다.

 

다행스럽게도 난 음식을 맛있게 만들지 못한다. 자주 음식 만드는 걸 가족들이 말려준다. 하지만 내 쌍둥이칼을 들고 있는 시간을 난 정말 사랑한다(오해하지 말길, 다른 용도로 절대 쓰지 않는다. 칼 들고 부엌에서 조리만 한다). 내게 쌍둥이칼은 다락방이다. 숨어 있기 좋은 오두막이다.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가족들이 둘러앉아 이것저것 하고 있어도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가 있다. 혼자 다른 방에 가거나 외출하는 것은 뒤탈이 많다. 그럴 땐 부엌에 가서 칼을 들면 된다. 어쨌든 내가 든 것은 칼이기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는다. 무엇을 하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뭔가 먹을 것을 기대하고, 난 뒤돌아 부엌 창을 열고 도마를 놓고 혼자 있을 시간을 기대한다. 일거양득.

 

이럴 때 난 내 쌍둥이칼을 꼭 쓰고 싶다. 이 칼은 내게 다락방이자 사물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이야기해주는 친구이다(칼이 친구라,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소린가 하겠지만 조금 더 들어보길). 19년 동안 손때가 묻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특별하게 잘 잘려서도 아니다. 이 칼은 무겁고 느리고 듬직하고 두툼하다. 칼인데도 약간 미련한 느낌까지 든다. 하지만 대상을 만나는 방식에 있어서 곰 같은 내 쌍둥이칼보다 정직한 것을 아직 나는 보지 못했다. 이렇게 맑고 지혜롭게 대상을 만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겐 칼이 두 자루 더 있다. 같은 쌍둥이칼이지만 아시아형 모델이라는, 보다 작고 날렵하고 가벼운 게 있다. 당연히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고 칼질이 빠르지만 잘 쓰지 않는다. 그저 편하다. 이 쌍둥이칼은 내 쌍둥이칼이 아니다. 그리고 세라믹칼. 이건 사과를 썰어도 사과를 써는 건지, 파를 써는 건지 모른다. 뭘 썰든 똑같다. 썰고 있는 것이 세라믹칼이라는 것만 알려준다. 사과 대신 비타민을 먹으면 돼,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두서없이 다른 칼들에 대해 투덜거리는 건 당연히 내 칼이 얼마나 사물을 잘 이해하고 얘기하는지 말하고 싶어서다.

 

난 만남에 서툴다. 대상에 대한 이해의 방식과 표현의 방식, 두 부분에서 모두 서툴다. 그건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계속 보려 한다는 것, 보기 싫어하는 것은 보지 않으려고 끙끙거린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거다. 편견과 아집으로 흐려진 눈과 마음에 들어오는 사물은 절대 사물 그대로가 아니다. 내게 그 사물은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난 아무것도 만난 적이 없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칼은 그렇지 않다. 칼끝이 사과 껍질에 닿는 순간부터 사과의 조직을 처음 찌르는 순간, 향과 즙이 삐져나오고, 어느 씨앗은 건드리고, 어느 씨앗은 가르면서, 좀 더 무른 조직과 단단한 조직을 지나 사과가 반으로 툭, 잘려 도마에 떨어지기까지, 묵직한 내 칼은 발랄한 사과가 되어준다. 최소한 내 손가락과 손목과 근육을 통해 사과를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준다. 이게 사과야, 라고. 이제 사과를 알겠지, 라고. 그리고 다시 내 칼은 그냥 칼이 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직 난 철들지 않았지만 내 칼은 적어도 철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시시한 농담 속 차이는 아니겠지만, 있는 그대로 만나지 않는 것은 만남이 아니라 격리다. 격리된 자신을 평생 지켜보는 시간에 대해 ‘살았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쌍둥이칼의 다른 한 쪽처럼 내가 대상을 만나길. 자, 이제 칼을 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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