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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봇짐/이현경

에세이향기 2022. 1. 22. 11:57

봇짐/이현경

 

노란 주전자에 새알 가득 들은 동지팥죽을 들고 열여덟 살 여고생은 엄마 심부름을 가던 중이었다. 밤은 추웠고 길은 약간 미끄러웠다. 목포예식장을 휙 지나쳐가다 여고생은 뒤돌아보았다. 뭔가가 그녀를 잡아끈 것이다. 한 손으로 봇짐을 꼭 안은 여자가 목화송이 같은 눈을 한 손으로 받고 있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여자에게 맞은편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여자는 군말 없이 따라와 여고생과 함께 오뎅과 붕어빵을 먹었다. 기차역은 한참 더 가야 하는데 여자 입에서 칙칙폭폭 칙칙폭폭 소리가 느닷없이 흘러나왔다. 봇짐을 아기처럼 꼭 껴안으면서 아아앙 아아앙 으버버 으버버 칙칙폭폭…… 여고생은 여자의 말을 알아들었다. 몇 년 전, 기차역에서 아기를 뺏긴 여자가, 눈 맞으며, 눈에 눈물 가득 달고, 서 있는 것이다. 여자를 목포역에 데려다 놓고 기다리라고, 한 시간만 기다리면 반드시 데리러 올 거라고, 손가락을 걸고 당부하던 여고생은 쌩하니 달려 시집간 언니 집에 노란 주전자를 배달하고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 아버지가 교회 장로인 데다 무슨 요양 시설인가, 복지 센터인가를 운영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무리였다. 밤 9시가 넘은 데다 친구는 뭔가를 부탁할 만큼 아버지와 친하지도 않았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여고생은 역에 들러 여자를 데리고 식구들 몰래 자신의 방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밥과 국과 반찬을 몰래 퍼다 먹이고 소곤소곤 이불을 덮고 자려는데 결국 엄마에게 들키고 말았다. 정당하게도 엄동설한에 여자는 밖으로 쫓겨났다. 미친년 재우다 불이라도 내면 어쩌느냐는 게 이유였고 덩달아 여고생도 한동안 ‘미친년’으로 불렸다.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길, 루크라 언덕에서 여자는 그녀를 만났다. 은빛 눈으로 빚은 태양을 이고 오는 것처럼 멀리서도 그녀는 환하게 빛났다. 아 성모구나, 여자는 저도 몰래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와 몇 뼘 거리로 마주쳤을 때 그제야 성모 등에 실린 커다란 집이 보였다. 걸망 같은 회색의 커다란 봇짐, 집을 내려놓은 성모와 가게 앞에 걸터앉아 맞담배를 피웠다. 성모는 잘 웃었다. 하필이면 아프거나 미친 여자 앞에서 빈약한 젖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건 그 여자의 오랜 지병. ‘누덕누덕 뱃구레가 두툼한 성모는 지금 배가 고파’, 여자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 평짜리 가게에 들어가 비싼 비스킷을 샀다. 제 키보다 높은 짐을 지고 어린 예수들이 져 나른 무거운 양식이었다. 웃으며 몇 번이나 여자에게 되돌려주던 성모는 천천히 종이 포장지를 벗기더니 종이 껍데기는 품에 담고 과자가 든 은빛 알맹이는 여자에게 주었다. 웃으며 여자는 성모에게 알맹이를 되돌려주었다. 몇 번이나 은빛은 하얗게 빛나며 공중을 오갔다. 이윽고 성모는 은빛 헤쳐 노릿노릿한 살덩이를 꺼내더니 웃으며 그녀 입에 넣어주었다. 여자도 성모 입에 과자를 넣어주었다. 성모가 사팔뜨기로 웃었다. 잘 구워진 살덩이 씹으며 여자도 웃었다. 하나둘 아이들이 둘 주위를 에워쌌다. 성모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손에 과자를 쥐여주었다. 성체를 씹는 아이들을 보며 성모가 웃었다. 성모가 여자 손을 잡아 이끌었다. 땟국 전 성모 손을 따라 여자 손은 오랫동안, 이천 년 동안 배고픈 따스한 얼굴에 머물렀다.

나그네 하나가 바랑 같은 봇짐 하나 메고 이른 아침 오두막집에 당도했다. 서울, 인천, 안산과 금성, 안드로메다 어디어디를 돌다가 온 그는 하룻낮과 하룻밤, 그리고 다시 하룻낮을 보내며, 먹고 자고 걷기만 하다, 왔던 그대로 봇짐 하나 어깨에 메고 해거름에 또 다시 길을 떠났다. 다음 날 밤, 발신지가 ‘팽목’으로 되어 있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인천항에서 낯선 이 포구까지 오는 데 수십 일이 걸린 데다 그사이 몸은 식고 손톱도 다 닳아졌으니 삼도천이나 건넜을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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