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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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저울/장석남

에세이향기 2022. 1. 22. 12:02

저울/장석남

 

가끔 수영을 합네, 탁구를 합네 하며 몸뚱이를 움직인다. 살아온 내력을 몸에 고스란히 지닌 터라 중년이라고 불리면서부터, 그대로 두었다가는 몸이 주저앉을 판이라고 경고를 받은 바이다. 말년에 뭔 영화를 보겠다고 극성을 떠는 꼴 같아 구차스러운 맘 텁텁한데,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까닭을 헤아리니 또 한둘이 아니다. 이, 계속 늘어나는 생의 구속 사유들을 어쩔 것인가!




운동이랍시고 하고 나오면 샤워를 하고 저울에 올라간다. 눈금을 바라보면서 실망하기 일쑤다. 좀체 체중이 줄지 않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저울 옆에는 탈수기가 놓여 있다. 물 철철 흐르는 수영복 가지들을 그 안에 집어넣고 다이얼을 돌려놓은 다음 저울에 올라가게 되는데, 이내 털털거리면서 요동치는 탈수기는 또 뭐란 말인가. 나는 순간적으로 내 몸뚱이가 혹시 세속의 탈수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은 나를 과체중으로 만들더니 다시 그것을 덜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찾아드는 나의 자학적 식욕은 내 것이 아닌 듯싶은 때가 많다.




가끔 절간에 가게 되면 배가 늘어진 채 웃고 있는 아저씨 석상(石像)을 만나기도 한다. 달마상이라던가? 그러한 석상이 있는 절간의 값어치는 별로로 여겨지지만 한편, 한없이 평온한 마음의 주인이라면 비만이어서 나쁠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과체중이 그렇게 죄악시될 것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저울, 무게를 재는, 한 사회가 합의한 통일된 도량형. 맨 처음 저울 구경을 한 것은 어린 시절 어느 명절 즈음이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저울은 돼지를 달아매서 근수를 다는, 추가 딸린 것이었다. 돼지를 자빠뜨리고 솜씨 좋은 아저씨가 새끼로 재빨리 네 다리를 모아 묶고는 앞발과 뒷발 사이에 목도를 가로로 걸쳐 들어 올리면 거기에 저울대를 끼우고 근점이 있는 추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근수를 달았다.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직감한 돼지의 격렬한 콧김과 울음소리도 함께 매달렸다. 겉 돼지 백서른 근이니, 큰 놈은 이백 근이 나갔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곧 목숨을 잃게 될 돼지가 불쌍하다거나, 나아가 범생명의 존엄이라거나 하는 유의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것도 몸과 마음의 여유 문제일지 모른다. 당시 나는, 우리 어린아이들은 지방질 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 직전의 처지였다. 새덫을 놓아 새를 잡아먹고, 개구리의 뒷다리를 뽑아 불에 구워 먹었다. 지금보다 훨씬 마음씨 고와야 할 어린아이였지만 당시 돼지며 새며 개구리는 완벽한 먹을거리였지, 생명 운운할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얼마 전 키우던 닭을 잡지 못해 꾀를 부리자 어머님이 한 말씀을 쏘았다. “니들 배에 기름이 끼어서 그렇다. 그게 먹고 싶어봐라. 그런 게 어딨냐…….” 맞는 말씀! 닭을 잡아야 하는 궂은일이 마트에 가서 1만 원 남짓이면 깨끗이 손질된 닭을 사다가 삶아 먹으면 되는 ‘가치 계량’에서 밀려난 때문인 것이다.




어머니의 진술에 의하면 나는 어렸을 적부터 무게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많이 나갔다고 한다. 이른바 뼈가 무거웠다는 것인데, 부피에 비해 그러했다는 말일 것이다. 나를 안던 가늠으로 다른 집 아이들을 안을라치면 가뿐하게 들렸노라고, 자랑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톤으로 하시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나의 몸무게는 보기보다 많이 나가며, 그것은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어떤 사물에 대한 통일된 도량형에 의한 판단이라면 몰라도 인간에 대한 판단과 그것에 결과한 선입견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통일된 문제로 적국의 아이들을 계량해보는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새로운 가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직업, 새로운 발견, 새로운 행복, 새로운 노래, 새로운 예술, 새로운 해답 등등. 서로 겹치고 얽힌 의미들이지만, 여하튼 ‘새로움’의 발견은 통일되고 합의된 기존의 가치 속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법거량(法擧揚)’이라는 말이 있다. 법을 달아본다는 의미로 수행자들 사이에 통용되는 말이다. 수행의 깊이가 얼마쯤 될지, 도력이 높은 스님들이 내미는 저울인 셈이다. 거기엔 통일되고 합의된 도량형이 있을 수 없다. 각각의 근기에 맞는 수행이 있을 뿐이고, 각자가 깨우쳐 통과하는 문의 크기도 제 생사가 통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른바 양팔 저울의 한쪽 접시에 나를 올려놓고, 다른 쪽 접시에 무엇인가를 올려놓는 버릇이 있다. 눈금이 똑바로 0점에 이르려면, 그때그때 올려놔야 할 품목들이 다르다. 무지개 백서른아홉 개가 필요할 때가 있고, 어둠 삼천 마지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설악산만 한 것이 올라가도 이쪽이 안 올라갈 때가 있고, 이슬 한 방울로도 가뿐히 올라갈 때가 있다. 나는 ‘저쪽’ 접시에 새벽 별빛 한 접시로 족한 무게이고 싶다. 이쪽의 나도 그만한 것이 되어 있을 테니까. 우리는 모두 저울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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