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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마경덕

에세이향기 2022. 3. 16. 19:36

구멍

마경덕

구멍은 사방에 있었다. 물 샐 틈 없는 바다마저 구멍이 있어 파도에 발을 헛디딘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밤마다 호롱불 아래 아홉 켤레의 양말을 기웠고 옆집 아저씨는 노름빚에 시달려 온몸에 구멍투성이었다. 솥이나 냄비를 때우러 다니던 땜쟁이 영감은 위장에 빵구가 나서 평생을 골골거렸다. 막히거나 뚫려도 걱정인 것이 바로 구멍이었다.

내게도 기워야할 구멍이 얼마나 많았던가. 믿었던 사람에게, 느닷없는 운명에 걷어차여 뻥뻥 뚫린 흔적들. 나는 막힌 하수구를 뚫고 물이 새는 수도관을 틀어막으며 살아 왔다. 구멍에 익숙한 나는 단춧구멍 같은 구멍으로 간신히 목을 디밀고 살았다. 실이 풀린 단추처럼 간당간당 구멍에 매달려 살았다. 오래된 구멍, 은밀한 구멍하나를 기억한다.

돼지우리 앞엔 조선소가 있었고 조선소에 딸린 대장간이 있었다. 조선소는 늘 드나드는 배들로 북적거렸다. 대부분 배 밑창에 구멍이 뚫려 구멍을 때우러 뭍으로 오르는 배가 많았다. 배의 아랫부분은 물의 저항을 막기 위한 V자 형태여서 바퀴가 달린 도꾸라고 부르는 틀을 물속으로 밀어 넣고 균형을 잡아 배를 앉혔다. 도꾸를 당기면 기차 선로처럼 생긴 레일 위로 커다란 배가 천천히 끌려왔다. 기름 묻은 굵은 쇠줄이 팽팽히 감기며 그 무거운 배를 육지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쇠줄 감는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가 이씨였다.

이씨는 까만 기름이 든 됫병 하나를 우리 돼지막 구멍으로 밀어 넣고 일을 마치고 돼지막에 들러 찾아가곤 하였다. 기름병을 들고 나오는 이씨와 마주치면 계면쩍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나도 멋쩍게 웃었다. 그 기름이 어디로 가는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난한 살림에 얼마간 보탬은 되었을 것이다.

그 구멍으로 가끔 쇳조각이 건너오기도 했다. 그 쇠붙이는 조선소에 딸린 대장간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조선소에서 필요한 대못과 연장은 그곳에서 주로 만들어졌는데 그 당시 고철은 엿장수가 가장 좋아하는 인기품목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모른 척 눈감아준 그 으슥한 구멍은 숨막히게 가난한 사람들의 숨구멍 같은 것이었다.

​ 배가 볼록 튀어나온 조선소 사장, 사장이 사는 집은 동네 초입에 있었는데 마당이 무척 넓었다. 호기심 많은 나는 울타리 구멍으로 마당을 훔쳐보곤 했는데 넓은 마당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하얀 거위 한 마리가 뒤뚱뒤뚱 걸어다녔다. 인기척만 나도 꽥꽥 달려드는 거위가 무서워 구멍으로 들여다본 그 마당 넓은 집은 내게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했던 그 시절은 골목마다 아이들이 북적거렸다. 입 하나를 덜기 위해 계집애들은 남의 집 애보기로 식모로 사내애들은 양자로 혹은 고깃배에서 밥을 짓고 허드렛일을 하는 화장으로 보내졌다. 손등이 터지고 손톱 밑이 까맣던 어린 청년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를 '화장' 이라고 불렀다.

​ 광양 언니가 부쳐온 통구맹이. 통짜 몸매에 인물도 박색인 녀석, 뱃머리 닮은 둥글넓적한 대가리 거무죽한

몸통이 허름한 통통배를 닮았다.

밥하고 빨래하고 막걸리통을 져나르던 화장. 입 하나 덜자고 고깃배에 실어 보냈다는 어미는 죽은 지 오래,

갑판을 닦으며 배호를 부를 때 장충단공원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얼굴 모르는 그의 아비도 안개에 가려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밥이 타고, 반찬은 짜고, 말귀마저 어두워 귀싸대기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날마다 하늘 아래 혼자라서 구둣발에 차였다. 그래도 밥은 실컷 먹어요, 씩 웃던 애송이 화장(火匠).

남해에서 붙잡혀 온 통구맹이. 무를 넣고 지지면 속풀이로 그만인 못난이 통구맹이. 손톱 밑이 까맣던 앳된

그 총각.

「통구맹이」전문 - 두루뭉술한 통구맹이라는 생선을 보면 통통배가 생각나고 뱃사람들의 밥을 짓던 어눌한

화장(火匠)이 생각난다. 양동이로 바닷물을 퍼 올려 박박 갑판을 닦던 그 청년은 배곯지 말라고 섬에 사는

늙은 어미가 낯선 배에 실어 보냈다고 한다. 사람의 목구멍은 얼마나 무서운 구멍인지, 파도 치는 깊은 바다로 자식을 보내고도 살아야했다. 아비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그 화장은 하늘 아래 늘 혼자였다. 그는 배불리 먹은 세끼 밥의 힘으로 발길에 차이고 배 터지게 욕을 먹으며 버티었다.

우리 외가에 세든 돈이네. 돈이 먼 친척인 오갈 데 없는 도관이 오빠도 눈칫밥을 먹으며 단칸방에 얹혀 살았다. 그가 하는 일은 물긷고 군불 때고 장작 패는 일, 도끼로 통나무를 쪼개 마루 밑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가 휘두르는 다부진 도끼에 햇살도 반짝 잘려나갔다. 그러나 돈이 엄마는 일 잘하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밥을 많이 먹는다고 타박이었고 눈치코치 없다고 나무랐다. 어린 나는 일 잘하는 그 오빠가 왜 구박덩이인지 몰랐으나 나이가 들어 알 수 있었다. 젊은 부부와 어린 딸과 다 큰 총각이 단칸방에 함께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댁 문간방에 세든 돈이네, 그 돈이네에 얹혀 살던 먼 친척 도관이. 땅딸한 키에 옹이처럼 빡센 돈이네 오빠. 장작 패고 군불 넣고 일 잘하는 도관이는 구박덩이. 밥만 축내는 식충이, 눈치코치 없는 미련 곰탱이. 차디찬 윗목에서 벽만 보고 잔다고 했다.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만큼 잠귀가 어둡다고 했다

- 「단칸방] 전문

돈이네 오빠는 벽만 보고 잔다고 했고, 돈이 엄마는 잠귀도 어둡고 눈치도 없고 꽉 막혔다고 했지만 벽만 보고 잠든 척하는 그의 심정을 나중에 알았다. 구멍 하나 없이 사방이 꽉 막힌 도관이 오빠는 바닷가에 하염없이 앉아있기도 했는데 돈이네에서 한 해를 버티다 어디론가 떠나갔다.

섬에 사는 어린 처녀도 배를 타는 노총각 김씨를 따라 왔다가 말만 번지르르한 빈털터리에 바람둥이라는 것을 알고 만삭인 아이를 지우고 떠났다. 떠나고 헤어지는 일에 익숙한 바다는 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 어쩌다 조선소에 철선이 들어오면 동네가 술렁거렸다. 그 육중하고 무거운 철선을 조선소에 부려놓는 날, 사람들은 일거리가 생겼다고 입이 헤 벌어졌다. 철선은 목선과 달리 짠물에 벌겋게 녹이 슬어 망치로 두드려 녹을 제거한 뒤 칠을 해야만 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끝이 날카로운 망치로 녹이 슨 부분을 내려치면 깡깡, 요란한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 그대로 망치 이름은 깡깡 망치였다. 망치질은 동네 아낙들이 맡아서 하였다. 보통 보름 정도면 일이 끝났는데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 경쟁이 치열했다.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정도 선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표를 나눠주었는데 그 표가 깡깡표였다. 뱃전에 달라붙어 종일 쳐대는 망치 소리는 깡깡깡, 해지도록 마을에 울려 퍼졌다.

널빤지를 밟고 서서 일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엄마도 수건을 눌러 쓰고 보호안경을 착용하고 일을 하셨다. 종일 땡볕에서 망치질을 하고 녹찌꺼기로 얼굴이 꺼멓게 변해 어스름에 집으로 오셨다. 너나없이 모두 고단한 삶이었다.

그런 중에도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있었으니 조선소에서 만든 배를 처음 바다에 띄우는 진수식(進水式)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높은 깃대에 만국기가 펄럭이고 돼지머리와 고사떡이 차려지고 술도가에서 막걸리통도 배달되었다. 바라만 봐도 푸짐한 잔치에 파도가 춤추듯 출렁거리고 애 어른 모두 일찌감치 조선소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선주는 고기를 잡아 돈도 많이 벌게 해달라고 코가 닿도록 절하고 무사고를 비는 징소리도 요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수식의 하이라이트는 떡 던지기였다. 뱃전에 서서 누군가 준비한 찰떡을 구경꾼에게 던지면 먼저 떡을 줍겠다고 난리법석이었다. 떡은 대부분 흙바닥에 떨어졌지만 배고프던 시절이라 흙 묻은 떡도 별미였다. 무엇보다도 떡을 쪼개보면 꼬깃꼬깃 접힌 지폐도 들어있어 재미를 더해주었다. 어쩌다 찰떡 속에서 지폐가 나올 때면 뛸 듯이 기뻤다. 가난했던 시절, 공짜로 얻은 돈 한 푼은 잠시나마 고달픈 삶을 달래주었다.

나는 수많은 구멍에게 감사한다. 구멍난 양말, 구멍난 가계, 구멍난 가슴, 구멍난……눈물 젖은 빵을 내게 건네 준 내 가난에게 감사한다. 내가 만약, 단단한 철선처럼 구멍 하나 없이 살아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수없이 뚫려 이제 견딜만한 내 구멍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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