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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박종숙

에세이향기 2022. 12. 26. 02:38

억새

 

                                                                                                                             박종숙 

 

 가슴이 비어 있어 그리도 눈부신 꽃을 피우는 것일까. 욕심이 없어 은빛 너울 속에 손을 흔드는 것일까.

 

 바람이 불어오면 그 무리 속에서 수런수런 들리는 듯한 이야기가 있다. '모두가 떠나고 있어요.' 멀리 논둑 한자락에서, 또는 잎 진 풀숲 속에서 하얗게 손끝을 세우고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꽃! 그들은 언제나 빈 들녘에서 행인을 부른다.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듯 길 가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순결한 모습의 춤사위를 펼치는 유희의 군락이다.

 

 억새는 가을의 늦 동산을 지키기 위해 피어난다. 먼 산에 단풍이 들고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기다리기라도 한 듯 멀쑥한 키를 앞세우고 조용한 축제를 벌이는 우아함이 억새의 참모습이다.

 

 11월의 제주는 하얀 융단으로 치장되어 있는 섬이었다. 산굼부리로 가던 야산 일대에서 여행객들을 영웅시 해주던 환호의 손을 나는 잊지 못한다. 신혼의 꿈과 사랑을 상기시켜 주던 마음 밭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그 날의 억새는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 아름다운 추억을 안기고 있다.

 

 억새는 바람의 혼을 키우며 산다. 바람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는 그 꽃의 아름다움은 빛이 나지 않고, 은실 발을 날리고 싶어도 날지 못한다. 억새는 바람의 의지가 담기고 바람의 꿈이 펼쳐져 있으며 바람의 생명이 살아 있게 된다. 그는 바람에 의해 쓰러지거나 꺾이지 않는다. 미지의 화랑을 끝없이 맴돌다 와도 꼿꼿이 자리를 찾아 일어설 수 있는 모습이 의연하다.​

 

 억새는 그리움을 안고 피어난다. 물빛으로 감도는 하늘을 바라보고 고운 심성을 키우려고 긴 목을 빼고 문 채 하늘로 시선을 모으는 얼굴이 아련하다. 떠나는 계절의 정한을 잊지 못해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 듯 별리의 몸을 추스린 모습이 가련하다고나 할까. 학의 날개처럼 고고함을 그리는 백의의 자락이 눈부시다. 그의 깃 속엔 찬란하면서도 평범하고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무게 있는 지난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 하루를 바라보는 애상의 눈빛. 그것은 그리움의 표상이 아닐까.

 

 억새는 속살을 태우고 홀로 영그는 꽃이다. 망부의 한을 달래듯 절대 고독을 감수하며 고향의 하늘을 지키는 성숙함이 돋보인다. 산속에서, 들녘에서 논둑 어귀에서 하얗게 소복을 하고 있는 그는 심부로 흐르는 열정을 감춘 채 말없이 드높은 위상을 펼쳐낸다. 제 영역 안에서 제 경계를 지키는 법도와 순열을 따르며 참 자유를 누린다.

 

 억새는 걸림이 없다. 어디로든 떠돌아다니다 정착하게 되면 그곳에 뿌리를 내리는 토착민처럼 제2의 인생을 새로운 대지 위에 펼치게 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뛰어넘어 슬픈 영가를 부르기도 하고 천도 제를 올리기도 하며 소리 없는 한을 묻기도 한다. 그는 혼자이기보다 많은 무리 속에 묻혀 살아가길 좋아한다. 대중 속에 어우러져 돋보이지도 쳐지지도 않는 범주를 지켜가며 소박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나는 추억에 잠겨 잠시 호젓하게 들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가을 들녘은 떠나가면서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비워가면서 가득히 채워줄 것을 예약하고 있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나면 세상은 아름다운 것으로 넘치게 된다는 세심의 길을 말없이 펼쳐준다. 억새는 유한에서 무한을 꿈꾸는 이들에게 영원한 절대자와의 합일을 이룰 듯 황홀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들에서 꺾은 햇억새를 오지항아리에 꽂을 때면 식구들 눈에 잘 뜨이는 장소를 택하게 된다. 새눈을 닮은 까치밥과 찔레꽃 열매를 곁들여 꽂으면 계절을 잊고 사는 그들 가슴에도 가을이 물씬 살아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해묵은 억새를 교체하는 일은 마치 새사람을 들이는 행사처럼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런 날은 어느덧 내 가슴에도 지난날에 대한 사랑의 엘레지를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계절을 바꾸면서 억새와 눈맞춤한 세월이 반평생을 넘었다. 해갈이를 하면서 쌓은 정이 무엇보다도 두터워졌다. 억새가 핀 방에 있으면 바람이 불어오지 않아도 바람을 느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있어도 그와 함께할 수 있는 교감을 이루게 된다.

 

 오지항아리에 꽂힌 억새는 세파의 흔들림 속에서도 강인한 정신과 애틋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끝없이 자유를 향해 도전하라고 한다. 그래서 일 년 내내 그와 함께 오지를 돌며 유랑을 꿈꾸게 된다.

 

 햇억새가 꽂이는 날은 내 영혼이 부활하는 날이다.

 햇억새가 꽂히는 날은 내 삶 가운데 기쁨이 소생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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