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따뜻한 황홀/김경성

에세이향기 2023. 1. 17. 02:56
<2018년 1월-2019년 12월-울산신문 시인의 詩선>




1.
따뜻한 황홀


김경성






어떤 나무는
절구통이 되고
또 다른 나무는 절구공이 되어
서로 몸을 짓찧으며 살아간다


몸을 내어주는 밑동이나
몸을 두드리는 우듬지나
제 속의 울림을 듣는 것은 똑같다


몸이 갈라지도록, 제 속이 더 깊게 파이도록
서로의 몸속을 아프게 드나든다


뒤섞인 물결무늬 절구통 가득히 넘실대며
절구공이 타고 흐른다




김경성 시인-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2011년 《미네르바》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와온』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이 있다. 2017년 세종나눔 문학도서에 선정.




  무술년이다. 신정 지나고 추위가 풀린 날 차 마실 가는 길, 어느 허름한 너와 집 담장 너머 왼쪽 귀퉁이에 낡은 절구통이 보인다. 어릴 적 집집마다 가을걷이 전 찐쌀을 빻거나 간단하게 집안에서 쓰이던 도구이다. 요즘 민속박물관에서나 보게 될 드문 풍경이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낡고 흐무러져 있다. 그늘이 반 쯤 가려 더욱 쓸쓸해 보인다. 구석의 따뜻한 시선이 김경성 시인의 따뜻한 황홀에 머문다.


  어깨에 무거운 카메라를 매고 시어를 찾는 시인의 상상력은 무한하다. 다의성을 가진 시적 나무는 절구가 되기도 하고 젓가락이 되기도 하고 책이 되기도한다. 시의 속성은 따뜻함과 발견이다.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예리하게 오래된 나무에 머문다. 나무의 속성은 배려에 있다. 절구통과 절구공은 한 몸이다. 제 살이 파이도록 상처를 주고받는 절구, 사람도 마찬가지 상처를 주기도하고 받기도하며 배려하며 용서하며 다시 성장해 가는 것, 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배려는 쓰임새이다. 시인은 나무로 만든 절구통과 절구공이 주고받는 대화가 올록볼록 에로틱하다.


  낮과 밤 뿌리와 우듬지의 간극이 사물과 자연에 맞물려 있다. 옳고 그름이 조화로울 때 음양이 뒤섞여 평정이 되는 것, 당신과 내가 주고받은 말에도 상처이거나 용서이거나 울음이거나 깊은 감정이 올라올 때 울림이 될 때가 있다. 시의 서정은 맑은 감정을 끌어 올리는 치유의 속성도 갖는다. 물결무늬 절구통 가득히 넘실대는 절구공을 타고 흐르는 나무의 감정, 김경성 시인의 따뜻한 황홀로 무술년 한 해를 시작한다.-한영채 시인










2.
그 여자 마네킹


강봉덕






때론, 패션도 종교가 된다
묵언수행 하는 그 여자
침묵으로 한 종파를 완성시킨다
그 종파의 교리는 계절을 앞질러 가는 것
한 계절 똑같은 웃음이나 빛깔
표정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계절에 이르기 전
그 여자의 설법은 고요하고 은밀하다
이 거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술에 걸리듯
그 여자의 짝퉁이 되기 시작한다
포교는 항상 중심에서 변방으로 퍼진다
짧은 치마처럼 간단명료한 표정
미끈한 팔다리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며
파격적인 노출도 교리가 된다
패션이 변할 때 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표정을 만들며 순종적으로 바뀐다
경기불황이 몰려오면
그녀는 더 화려하고 빠르게 변신한다
사라진 추종자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은
침침한 눈으로 바늘귀에 실 꿰듯 힘겨운 일이지만
손바닥 뒤집듯 가벼울 수 있다는 듯
투명한 벽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 여자, 화려한 변신을 시작한다




강봉덕-경북 상주출생, 《동리목월》 신인상,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등단, 울산문인협회 회원, 시작나무 동인




  곧 봄이다. 봄은 패션이다. 너도나도 밖으로 나가는 횟수가 더 많아 질 것이다. 옷장을 열고 이 옷 저 옷을 만지다 밖으로 나간다. 마네킹이 입은 옷에 고급스러운 눈길이 간다. 마네킹이 입은 옷은 모두가 멋지다. 내가 고른 옷도 마네킹이 입은 옷이다. 옷을 입어 본 현실감은 곧 집에서 느낀다. 거울 앞에서 앞으로 보고 뒤로 봐도 깜빡 속은 느낌,


  울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강봉덕 시인이 바라본 마네킹은 어떤 마네킹이었을까, 화려한 변신은 그 여자. 마네킹으로부터 시작이다. 옷 가게엔 밤낮을 지키는 마네킹이 주인이다. 마네킹이 입은 옷은 계절을 앞선다. 유행을 낳기도 하는 패션은 종교처럼 멋을 낸다. 멋있다, 는 종교를 가질 만하다. 말 많은 여자도 그 앞에선 말이 없어지는 묵언수행 하는 여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색깔 모양을 쳐다보며 종파가 된다. 가끔 나도 미끈한 팔 다리 저 가늘게 개미허리처럼 되어 봤으면 할 때도 있다. 곧 마네킹이 입은 옷이 부러워질 계절이 온다.


  유행을 따를 때가 있었다. 가끔 힘든 스트레스가 오면 백화점으로 뛰어 갈 때도 있다. 그땐 영락없이 그 여자 마네킹의 레이다에 잡힌다. 그 여자는 카드를 종용한다. 값비싼 품질에 도도하게 카드를 긋고 5분간 쓴 웃음을 짓는 그 때부터 낭패다. 주부들은 거금 카드 값이 끝날 때까지 반찬 수를 줄인다든가 허리끈을 졸라매야한다. 그 여자 마네킹의 위력은 대단하다. 가까이 선물 받을 때 마네킹은 한층 도도해 보인다. 도도한 그 여자의 옷을 입을 때도 가끔 있었지만, 지금은 그 여자의 유혹에서 벗어 난지 오래다. 자연이 주는 그대로 문향이 흐르는 모습, 참이 되어가는 것으로 즐긴다. 올 봄 강봉덕 시인의 그 여자 마네킹이 입은 종교 같은 유혹에 옷 한 벌을 장만해 볼까나








3.



오규원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오규원 (1941~2007) 날 이미지 시인으로 유명,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 외 다수, 현대시작법,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역임, 2007년 지병으로 사망.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 수상




  3월 봄비 내리고 언제 추웠냐는 듯, 움은 쑥쑥 자라 양지바른 곳에 난초는 염소 혓바닥처럼 연한 순을 내 밀고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고 일찍이 어느 시인의 말이다. 까치가 울고 새들은 지저귄다. 아침 일찍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냉이를 캐러 가자는 거다. 겨울을 지난 봄밭 흙들은 부스스 일어나 부드럽고 순한 바람에 먼지를 날리기도 한다. 냉이를 캐러 나선다. 아직 산 아래 바람은 차다. 산자락에 위치한 밭에는 냉이가 지천이다. 냉이로부터 눈 부비며 더디게 봄은 온다. 밭갈이 하는 트렉트 소리 고랑을 만들고 우주의 기운을 알리고 있다.


  시인의 언어에도 봄은 온다. 저 담벼락, 저 라일락, 저 별, 저 언덕의 개나리 진달래 목련 라일락 봄꽃 들이다. 언어의 울타리가 되고 언어의 꽃이 되고 발질을 하며 뛰는 염소의 뒷태는 똥글똥글 언어에서 구르고, 아지랑이처럼 솟아 자유를 찾아나서는 언어의 봄길, 오규원 시인은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은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가대 가는 길, 생강나무 꽃이 노랗게 부풀어 있다. 며칠 후면 주위를 환하게 밝힐 것이다. 가지를 스치는 바람이 분다. 봄을 캔 냉이는 소쿠리 한 가득이다. 겨울을 지낸 파란 움파는 먹는 것보다 보는 즐거움이 더 큰 것 같다. 봄나물로 쌉싸름하게 무쳐 먹을 이 봄, 가족 밥상을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 발걸음 가볍다. -한영채 시인










4.
몽상가 타입


변희수








저 돌 지독한 몽상파의 육체를 가졌다


끓어오르는 한 때를 가지지 않았다면
저렇게 줄기차게 몽상하는 자세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뒹굴어도 멀리 차 버려도 한결 같은 자세다
눈도 귀도 다 지워버린 자만이 들 수 있는 경계


돌은 물질이 어떻게 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정신이 어떻게 물질의 자세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돌에게 모자를 띄우거나 담배를 권하는 일은 어리석다
멍하게 있는 것 같아도 돌은 침묵에 대해서
침묵만이 몽상의 육체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 육체는
더 이상 육체일 필요가 없지만


모른다는 것으로 완성되는 돌들의 육체
뭉툭한 몽상의 질감


비바람에 살점을 다 발라낸 근육
암만 봐도 몽상가 타입인데


꿈꾸는 물질이다




변희수 / 1963년 경남 밀양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2011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다는 그 섬에 다녀왔다. 봄꽃인 벚꽃과 유채꽃에 벌들이 날아든 것처럼 환상의 섬으로 여행자의 발걸음이 멈춘다. 보슬보슬 부드러운 흙이 섬을 헐거워지게 하고 있다. 봄은 밭을 일구어 새 씨앗을 기다리는데 하루 종일 흙을 만지고 싶다. 고랑에서 나온 돌로 담을 쌓아 돌과 돌 사이 바람이 드나들어 너와 나의 간극을 줄이고 침묵으로 소통되는 단단한 돌처럼 이웃이 되고 싶다.


  우뚝 솟은 산방산 자락에서 올레 10구간이 시작이다. 돌과 바람과 여자 여행자가 걷는다. 화산폭발로 이룬 섬, 검은 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나름대로 생각 속에 잠기고 생각이 생각을 낳기도 한다. 해안선을 돌며 파도가 일군 모래사장을 지나 군데군데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이 모여 이웃을 이룬 이곳에서 영락없이 여행자는 렌즈를 드리댄다. 저 돌은 몽상가 타입, 생각 속에 잠겨 침묵한다.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지만 자연은 그대로의 자유를 준다. 한 때 끓어오르던 붉은 정열도 품었으리라. 대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변희수 시인은 몽상가 타입인 돌은 멍하게 있는 것 같아도 돌은 침묵에 대해서 침묵만이 몽상의 육체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고 한다. 돌을 몽상가로 보다니 기발한 시적 아이디어다.


  돌은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몽상가 타입은 어떤 것일까, 낭만과 지적 즐거움을 꿈꾸는 몽상가는 돌처럼 단단해지고 싶어 한다. 돌 속으로 들어가 꽃을 피우고 새소리가 나며 남해 금산 그 여자도 다녀가는 몽상가에서 더 단단해져 가는 꿈꾸는 물질로 물상으로 물건으로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한영채 시인






5.


꽃들의 식사


이경례






땅따먹기 하고 있다 꽃들이
한뼘한뼘 손가락을 부채처럼 펼쳐서
환한 허공을 야금야금 따 먹고 있다
키가 멀대 같은 감나무 옆구리에 붙어
산수유나무가
연신 웃음꽃 피우고 있다
봄날의 승승장구에 기세등등한 산수유 꽃잎들이
허공 두레상에 둘러앉는다
아래층일랑은 산수유에게 다 내어 주고
위층을 소리꽃들이 먹는다고
나잇살만 먹었지 잔꾀라곤 도무지 모르는 감나무의
두툼한 손바닥으로
시끌시끌 새들 날아와 꽃 피우고 있다
양푼에 숟가락 걸쳐
허공에 가득한 봄을 맛나게 먹는다
풋것에 비빈 찬밥을 너도나도
긁어 먹는다
사이좋게 꽃들끼리 나눠 먹는다
달디 단 허공, 한 채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고
자꾸 늘어난다






약력 : 울산 생, 2006년 ‘심상’ 신인상, 2009년 ‘영남일보’ 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오래된 글자』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가 생각납니다. 작품 속에서 나체의 젊은 여성과 신사들이 앉아 점심을 먹는 장면, 푸르른 풀밭 위에 꽃들의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산수유 목련 모란이 지고 장미의 계절 오월의 꽃들이 웃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는 행인을 보고 응시 하듯이 손짓을 하듯이 꽃들은 저마다 땅따먹기 하듯 피기 시작했습니다. 손을 뻗어 허공을 야금야금 먹기도 합니다. 이제 느린보 감나무가 잎을 튀웁니다. 시끌시끌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자 손바닥만한 이파리를 키웁니다. 허공을 빌어 봄꽃들은 허공 양푼으로 향기를 비빕니다. 사이좋게 꽃들이 나눠 먹습니다. 지나가는 오월의 그림자도 나눠 가집니다. 울산에서 활동하는 이경례 시인은 달디단 허공, 한 채가 먹어도먹어도 줄지 않고 자꾸만 늘어 가는 오월이라고 합니다.


  경주 불국사 옆자리에 <동리목월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 때 사월 목련이 흐드러진 터널을 몇 해 건너다닌 적이 있습니다. 시 창작 수업을 거리에서 하듯 독수리 오형제가 날기도 했습니다. 울산에서 경주까지 시를 좋아 하는 문우와 같이한 시간을 새록새록 기억합니다. 서둘러 문학관으로 가기 전 벚꽃 핀 불국사 뜰을 거닐기도 하고 자릴 펴고 김밥과 차를 나눠먹으며 풀밭 위의 식사로 즐거운 한 때가 있었습니다. 마네가 봤으면 어땠을까요? 오월의 꽃들이 나체로 다가옵니다. 그들의 향기는 만 리를 갑니다. 우리들의 풀밭 위 만찬의 기억도 오랜 시간을 차지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가위 바위 보 땅따먹기 한번 해 볼까요?


-한영채 시인










6.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1964년 생,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농부일기〉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혈거시대(穴居時代)〉당선,현재 '비무장지대'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2001년 제20회〈김수영문학상〉2002년 제13회 〈김달진문학상〉2013년 제8회 <윤동주 문학대상> 2017년 제5회 <박재삼 문학상 > 시 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풋사과의 주름살》《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제비꽃 여인숙》《의자》《정말》동 화 *《귀신골 송사리》《십 원짜리 똥탑》* 산문집 *<시인의 서랍>외




  담장은 줄장미의 의자다. 그 붉던 오월이 담장에서 맥없이 지자, 마당 안 백합과 붉은 접시꽃이 자리를 지킨다. 마당은 온통 꽃밭이다. 꽃받침은 꽃을 받치는 기도이자 순정의 의자다. 절정은 순간의 빛으로 온다. 빛은 시간과 함께한다. 매 시간마다 변화하는 자리에는 푸르고 그윽한 향기를 뿜어낸다. 자연이 주는 향기는 무한대의 의자다. 오래된 나무의자가 마당 구석에 있다. 나무 의자에 빛이 내려앉는다.


  남산 솔마루 길을 걷는다. 숲이 우거진 나무 그늘로 한참 걷다보면 등어리엔 온통 땀에 젖는다. 잠시 나무의자에 기대 깊은 들숨과 날숨을 쉬는 사이 소나무 향기가 푸르게 다가온다. 누군가 다녀갔을 의자, 한참 기대고 앉아 기쁨과 슬픔이 이별이나 아픔도 상처를 지우듯 잠시 쉬었다 갔으리라, 그들의 깊은 서사를 기록하는 의자는 오늘도 의연하다. 더위에 지친 발걸음 소나무 그늘에서 기다려준 나무의자가 고맙다. 지나가는 발걸음도 자리를 펴고 앉는다. 내가 앉은 자리가 바로 안락의자다. 자연이 주는 충만한 사물은 모두 나를 받쳐주는 공손한 의자다.


  아버지 학교와 어머니 학교에 심어져 있는 시인의 어머니는 사랑이 남다르다. 어머니의 말씀을 시로 받아 적는 이정록 시인은 행복하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시인의 의자는 바로 어머니에서 온다. 어머니는 자식의 의자이기도 하고 자식 또한 늙은 부모의 의자가 되기도 한다. 나도 때로는 누군가에게 어떤 의자가 되기는 하는지, 했는지, 내가 기댄 의자는 무엇이었을까? 누구였을까? 어떤 것이었을까? 의자에 기대 잠시 생각해보는 은유의 유월이다.










7.
가시연


조용미




태풍이 지나가고 가시연은 제 어미의 몸인 커다린 잎의
살을 뚫고 물속에서 솟아오른다
핵처럼 단단한 성게같은 가시봉오리를 쩍 가르고
흑자줏빛 혓바닥을 천천히 내민다


저 끔직한 식물성을,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한
가시연의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나는
오래 방죽을 서성거린다


붉은 잎맥으로 흐르는 짐승의 피를 다 받아 마시고 나서야 꽃은
비명처럼 피어난다
못 가장자리의 방죽이 서서히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금이 가고 있는 소리를
저 혼자 듣고 있는
가시연의 흑자줏빛 혓바닥들




조용미(曺容美, 1962년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장작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길문학》에 〈청어는 가시가 많아〉 등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기억의 행성』,『나의 다른 이름들』. 2005년 제16회 「김달진문학상」 2012년 제19회「김준성문학상」




  7월은 연꽃의 계절이다. 땡볕아래 푸른 이파리를 흔들며 꽃은 탐스럽게 손짓한다. 연못에 핀 꽃의 종류는 다양하다. 수련, 홍련, 백련, 가시연, 어리연, 불교에서 대표적인 꽃이 연꽃이다. 두 손 받치며 기도하듯 여여한 꽃대와 넓은 잎 바람에 흔들린다. 시각과 미각과 청각을 돋우는 연은 더운 날 양산을 바치듯 공손하다. 나는 저 연잎처럼 누구에게 그늘을 지어 보기는 했는가, 어제는 가까운 통도사 말사 극락암에 다녀왔다. 햇볕이 비치자 극락암 연못의 노란 어리연들이 너도나도 서둘러 입을 뾰족 내밀기 시작했다. 계절의 심상은 고요하게 푸르다. 아름다운 조화로 어떤 사물에든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하는 조용미 시인의 불교적인 생명에 대한 깨달음의 시선은 늘 따뜻하다. 필자가 좋아 하는 시인 중에 한 사람이다.


  정원에서 가시연꽃을 피운 적이 있다. 가시연꽃은 전체에 가시가 많이 있어서 가시연꽃이라고 한다. 새끼손가락 마지막 마디 만하게 생긴 여문 씨앗을 칼로 틈을 주어 물에 담그고 한참 기다려야 씨앗은 입을 열고 싹이 나온다. 여문 둥지를 뚫고 나온 싹은 꽃 피우는 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꽃은 수줍은 듯 볕이 쨍쨍한 아침에 입을 열었다가 찰라 처럼 닫기를 서너 날, 가시연꽃의 수명은 다한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찬란할 만큼 가시연꽃의 자태가 흑자줏 빛으로 요염하다. 기다림을 보상하듯 오묘한 색은 오묘한 불교적 세계로 이끌기도한다. 하루 날 잡아 경주로 서출지, 월지를 다녀와야겠다.-한영채 시인












8.


나무


박목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門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시인, 경북 경주 출생. 본명 박영종. 1939년 '문장'에 '길처럼' '연륜' 등이 추천돼 등단했다. 청록파 시인, 서정시의 전통적 시풍을 세움, 향토성이 강한 서정에서 출발해 만년에는 신앙에 깊이 침잠하는 시 세계를 보였다. '심상' 발행인 역임, 한국시인협회장, 시집으로 '산도화'(1955), '경상도의 가랑잎'(1962) 등 다수가 있다.




  매미 소리로 펄펄 끓는 팔월 한 계절이 짙어간다. 녹음도 그늘도 깊어 간다. 여름의 나른함과 더위를 잊기 위해 만보 걷기를 시작한지 보름째다. 호수를 돌다가 공원 솔마루 길을 걷는다. 공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 개를 몰고 오는 사람, 라디오를 들으며 다니는 사람, 팔을 흔들며 운동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여러 사람들이 모여 공원의 풍경을 이룬다. 호숫가 벤치엔 멍한 눈빛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솔마루 길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길은 아늑하고 시원하고 향기롭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상큼하다. 그늘에서 풀벌레 울음도 연하게 들린다. 초록이 깊어질수록 사방에서 매미소리 우렁차다. 어디선가 멀리서 가까이서 까치소리 들린다. 꼬물꼬물 지렁이가 흙발로 기어 나온다. 개미들이 분주하다. 온몸이 땀에 젖는다. 누군가 지옥에서 빠져 나오려면 걸어라 그냥 걸어라 한다. 땀을 흠뻑 흘린 후 늘어졌던 마음은 한층 가뿐함과 함께 한 여름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첫 시집 '모량시편'을 낸 필자와 목월 시인은 경주 모량 출신이다. 70~80년대 4번 국도는 경주에서 아화까지 한 줄로 선 버드나무로 하늘을 찌르듯이 곧게 뻗은 가로수 길로 저 멀리 수평선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던 한때 유명한 길이었다. 목월선생의 시편에서도 종종 나오는 건천 가는 가로수 길, 여행 중 나무를 보며 시인의 고독한 심상으로 보며, 읽으며, 느끼며 나무 그늘로 들어가 한 그루 마음의 나무를 키워 가는 것, 늙은 느티나무를 보고 나를 만나고, 무리지은 단풍나무 그늘 속에서 네가 커 가는 시간을 보고, 마을 어귀를 지키는 과객 같은 팽나무 그늘에서 사랑을 품은, 외로운 파수꾼 회화나무의 그늘에서 잠시 나무의 은유를 듣자, 나무가 커 가는 계절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한그루 마음의 큰 나무를 심자.










9.
9월


김감우






초록이여
너 이제 할 말 다 했는가
뒷짐 지고 바라보던 바람
헛기침소리 내며 서서히
발자국 떼어 놓는데
초록이여
너 이제 준비 되었는가


그 옷 갈아입기 전에
수취불명으로 반환된 편지


품속에서 꺼내
다시 긴 사연 전할
붉은 잉크 준비 되었는가


정오 무렵
뜨거웠던 빛 따라
물들어 가며 사위어갈
각오 되었는가.






김감우- 열린시학 시부분 신인상, 울산문학 작품상 수상




  9월이 왔다. 아침은 쌀쌀해져 오고 활짝 열었던 저녁 창문은 이제 닫기로 한다. 지난 날 그 뜨거웠던 여름을 귀뚜라미가 힘겹게 밀어 내고 있다. 입추 지난 새벽부터 귀뚜라미는 가을이 온다고 하나 둘 고백을 한다. 이제 계절의 중심인양 풀벌레들의 합창소리에 못내 고개 숙인 더위를 떠나보내고 있는 것이다. 마당에 꽃무릇이 아직 소식이 없다. 구월 초순이면 언제나 제 자리에 올라온 기다림이었는데, 마당을 붉게 물들여 마지막 정열을 보태기도 했는데, 유난히 더웠던 지난여름 탓이라 믿고 싶다. 초록이여 그동안 세상에 던져진 말들, 할 말 다 했던가,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맑고 고운날도 있었을 터, 유난히 더워 힘들었냐고, 힘이 들었다고 보듬고 위로하며 서로의 가치를 다독이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가, 서서히 헛기침 소리를 내는 단풍나무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너와 내가 참고 견딘 지난여름은 그늘이 위대했노라고...


  구월 초순 백두산을 다녀왔다. 천지 가는 길, 미니버스를 타고 초록 짙은 우거진 숲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벌써 가을이 왔음을 안다. 이파리에 앉은 햇빛이 스멀스멀 빛을 잃는다. 이파리가 파리하다. 구절초 개미취 쑥부쟁이 산국이 한창이다. 마가목, 자작나무, 버드나무 잎은 몸을 흔들며 벌써 빛이 바래가고 있다. 천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는 수많은 계단, 천지에서 시작된 졸졸 내려오는 맑은 물소리, 고도가 높을수록 이파리의 힘겨움을 알 수가 있다. 산 너머 저 멀리 보이는 설국의 세계, 곧 가을의 중심이 다가 올 거라 예감한 초록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울산에서 활동하는 김감우 시인은 초록에게 할 말을 다 했는지 떠날 준비는 됐는지 안부를 묻는다. 옷을 갈아입기 전에 붉은 편지를 주고받을 생각을 한다. 수취인이 없어도 좋다. 붉은 잉크로 긴 편지를 써 보자, 성찰의 계절로 바람이 분다. 이제 가을 속으로 떠나기로 한다.-한영채 시인










10.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하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시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허수경 시인- 1964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경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후,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사, 1997),『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작과비평사, 2001), 장편소설『모래도시』(문학동네, 1996) 등의 저서가 있으며,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 1 · 2 · 3』(비룡소, 2000) 등을 번역했다. 현재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2001년에 제13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늘 봄날인양 멋쟁이라 불리던 가까운 사람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가을의 깊이만큼 문학계의 거목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최인훈 시인, <밤이 선생이다>저자 황현산 평론가가 가시고 이어 오늘 신문 문화란에 한국 문학계 산증인 김윤식 문학평론가가 82세로 별세를 했고 시월 초엔 멀리 독일에서 활동한 허수경 시인은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이달 3일 향년 54세로 타계했다.


  가을초입 봄시 동인 모임에서 허수경 시인의 작품세계를 들어다 보았다.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1992년에 스승은 병중이고 시절은 봄이라 사랑은 나를 회전시킬까 내가 사랑을 회전시킬 수 있을까 부디 사랑이 나를 회전시켰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25년 전에 미리 이제 떠나려한다. 혼자 가는 먼 집을 향하여 예견이나 한 듯 그녀는 떠났다. 떠난 시간을 생각하며 살아온 상처에게 킥킥... 허허로운 웃음 뒤에 울음을 차라리 아름다움이라 하자 보다 좋은 곳으로 영면을 향하여 기도한다.


  당신은 떠났지만 당신의 영혼은 검은 씨앗으로 알알이 독자들의 가슴에 박혀 있습니다.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간 당신...킥킥이라고 한번만 웃어 주세요.-한영채 시인












11.
중심


심 수 향






11월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듯이
배추가 제 삶의 한창때를 건너고 있다
꽃을 피우고 싶어하는 푸른 이마에
금줄같은 머리띠 하나 묶어주려고
이참 저참 때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배추는 중심이 설 무렵
묶어주어야 한다고 귀뜸을 한다
배추도 중심이 서야 배추가 되나보다
속잎이 노랗게 안으로 모이고
햇살 넓은 잎들도 중심을 향해 서기 시작한다
바람이 짙어지는 강물보다 더 서늘해졌다
띠를 묶어주기에는 적기인 것 같아
결 재운 볏짚을 들고 밭에 올랐더니
힘 넘치는 이파리가 툭 툭 내 종아리를 친다
널따란 잎을 그러모아 지그시 안고
배추의 이마에 짚 띠를 조심스레 둘렀더니
종 모양 부도처럼 금새 단아해졌다
부드러운 짚 몇 가닥의 힘이 참 놀랍다
이제 배추는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우며
꽃과 또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추수 끝난 들녘에 종대로 서 있는 배추들
늦가을의 중심으로 탄탄하게 들어서고 있다






심수향-울산 출신으로 2003년<<시사사>>신인상과 2005년<<불교문예>>신춘문예 등단, 한국펜본부 울산펜문학회, 숙명문인회 회원, 시집으로<중심> <잠깐 스쳐가는 잠깐> 봄시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계절이 중심을 건넌지 오래다. 보름달도 기운지 한참 되었다. 올해도 마지막 한 달을 둔 11월을 이제 며칠 남기고 있다. 흐르는 구름처럼 봄이 왔다가고 찬란했던 초록과 거대한 눈을 가진 태풍도 다녀가고 노란 은행잎이 날리는 가을거리에 쓸쓸함이 오고 또 다른 계절을 기다리고... 소용돌이 중심의 가장자리는 숨 막히게 잔잔하고 고요하여 고요가 중심이다. 삶의 중심엔 내가 서 있듯이, 배추도 사람도 중심이 바로 서야 그 어떤 것도 온전히 자기화 될 수 있다. 알을 심듯 노란 제 속을 꽉꽉 채워야 중심이 단단해진다는 심수향 시인의 시선으로 배추의 전언을 통해 삶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주말에는 먼 곳에서 첫 눈이 내리고 조금씩 추워진다는 소식에 서둘러 애벌 김장을 했다. 영남지방은 12월 중순이 김장철인데 김장의 재료인 무와 배추 수확은 서리가 내리기 전에 마무리를 해야 할 것이다. 만인의 입맛으로 11월의 꽃으로 다가온 배추는 푸른 이파리를 한 꺼풀 벗기자 아싹아싹 노란 속살을 드러내며 엉덩이 동그랗게 앉아 종 모양 부도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그동안 늦가을의 중심을 잘 잡았노라고 한다. 파 마늘 생강을 섞어 붉은 고춧가루와 갖은 양념을 만들고 노란 속살에 쓱쓱 버무리니 달콤한 향내가 집안을 진동한다. 우리의 입맛을 한층 돋우겠다. 가족의 한겨울 몸속의 중심을 잡아주겠다-한영채 시인










12.
전갈


류인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촉촉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류인서: 경북 영천 출생, 2001년 <시와 시학 등단>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아 있다』 『여우』가 있다. 육사문학상 젊은 시인(2009), 청마문학상 신인상(2010).




  12월이 바쁘게 가고 있다. 불황이라 해도 가까운 사람끼리 송년의 만남은 여전하다. 봄밤을 보낸 벚꽃 진 자리에서 다시 송년의 밤을 보내며 진한 쌍화차를 앞에 두고 가는 해의 안부를 묻는 문우들과 내일의 덕담은 서로에게 위안과 위로다.


  서랍을 뒤지자 낡은 엽서가 나온다. 엽서가 유행이던 시절 여행지에서 문득 보낸 사진, 잊고 있었던 설악산에서 소식을 보낸 친구의 엽서다. 그 해 설악의 단풍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계곡 물이 시원스레 흐르고 설악에서 사연을 보낸 친구의 젊은 모습이 보인다. 자주 소식 전하지 못한 눈 감은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지만 낡은 엽서에서 젊은 한 때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다. 하얗고 뽀송하던 에델바이스가 시간에 눌려 누렇게 변해 있다. 이 빠진 할머니처럼 반갑게 기다린 듯 웃고 있다.


  이 겨울의 소식을 먼저 보내 보자. 멀리서 눈 소식이 있고 여기는 겨울비가 아슴아슴 내리고 있는 중이다. 겨우내 먹을 김장은 마지막 가는 이 해의 송년 선물이다. 누군가에게 가는 해 서러워 말라고 마음의 연하장을 보내고 다시 오는 해에게 안부를 물어보자. 사는 것이 바빠 서로 안부를 묻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을 좁혀 오늘 밤 멀리서는 첫 눈이 내리는 겨울밤, 너에게 나에게 한 장의 편지를 써 보자. 나와 네가 보낸 마음이 다시 돌아와 무늬 없는 봉투에선 반가운 기별이 전갈처럼 기어 나오고 세게 물릴수록 두근두근 웃음과 눈물이 따라 올 것이다. 세월의 무게만큼 그리움이 더하고 추억으로 가는 길 올해의 마지막 비가 내린다. 한영채 시인












13.
바하를 들으며


김성춘






안경알을 닦으며 바하를 듣는다.
나무들의 귀가 겨울쪽으로 굽어 있다.
우리들의 슬픔이 닿지 않는 곳
하늘의 빈터에서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어 죽은 가지마다
촛불을 달고 있다.
聖 마태 수난곡의 一樂句.
만리 밖에서 종소리가 일어선다.
나무들의 귀가 가라앉는다.
今世紀의 평화처럼 눈은 내려서
나무들의 귀를 적시고
이웃집 그대의 쉰 목소리도 적신다.
불빛 사이로
단화음이 잠들고
누군가 죽어서
지하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김성춘 -1942년 부산 생, 1974년 '심상'지 첫 신인상 등단(박목월 박남수 김종길 추천), 제1회 울산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제2회 월간문학 동리상 수상, 울산대 사회교육원 시창작과 지도교수 역임, 동리목월 교학처장 및 편집장, 시집: <물소리 천사><온유>외 11권 출간




  다시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양정작은도서관 상주작가로 온 지 2개월, 삶은 두 번의 기회가 아닌 하루하루 새로움의 연속이다. 울산에 살면서 양정동을 처음 머문 터라 1개월은 양정동 지리 익히기에 바빴고 또 한 달은 도서관에서 해야 할 프로그램 짜기에 하루가 꽉 찼다. 긴 터널을 지나 온 듯 지난해와 새해를 맞이하면서 고전읽기와 힐링 캘리그라피 그리고 시인과의 수다 시간을 만들었다. 고전 읽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선택했고 시인과의 수다는 주위 사람들과 시를 읽고 서로 보듬어 사랑을 나눴으면 하는 바램에서였다. 그 중 캘리그라피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인의 글(시)로 시화와 캘리의 접목이 재미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에 캘리그라피에 관심을 가졌다. 잠시 배워야지 했었는데 벌써 수년이 지나다보니 이렇게 양정 주민들과 함께 붓질 중이다. 양정 뒷산 오치골에 생강나무 꽃이 활짝 피기까지 진행될 것이다.


  시월부터 양정작은도서관 달팽이에 머물면서 가끔 틈이 날 때 양정동 뒷산 오치골 산책은 나의 유일한 건강 프로그램이다. 좁은 골목을 지나 동사무소가 있고 아파트를 건너 골짜기 입구가 보인다. 버드나무가 많았다는 골짜기 입구는 꿈꾸며 생각하는 정원이 있고, 골짜기엔 겨울 그늘이 을씬년스럽게 짙어 얼음아래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그 옛날부터 까마귀와 꿩이 많아 오치烏雉골이라 명명 했다든가. 색 바랜 고춧대와 어린 남새들이 힘겹게 겨울을 견디는 텃밭에 접근금지라는 팻말이 생소해 보이기도하다. 조금 더 오르자, 때 아닌 개나리가 피어있고 아그배나무가 잎을 떨구고 붉은 열매를 달고 있다. 좀 더 일찍 올라 왔더라면, 아니 좀 더 기다려야 넓은 잎을 볼 수 있겠구나, 골짜기 끝 성불사로 가는 길은 멀다. 만 리 밖에서 범종소리가 일어선다. 나무들의 귀가 가라앉는다. 김성춘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을 잘 견디며 늠름하다. 저 솟구친 푸른 정신에 머리가 맑아진다. 은사시나무는 이름도 참 예쁘다. 암수가 딴 그루로 4월에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고 한다. 공해에 강해 생장 속도가 빠르다며 울산의 가까운 야산에 자주 보이는 나무이다. 은사시 나무 가까이 윤동주의 서시가 걸려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사월이면 이 산엔 진달래가 피고 오리나무 곁에 김소월의 詩 ‘진달래’ 가 더 빛을 발하며 서 있을 것이다. 맑은 물소리를 듣는다. 바하를 듣는다. 나무들의 귀가 겨울쪽으로 굽어 있다. 1월 달팽이의 걸음으로 한 해를 시작한다. 김성춘 선생님의 詩를 생각하며 오치골을 내려온다. -한영채 시인










14.
슬픔이 나를 깨운다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 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곁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발 한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황인숙: 1958년 서울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리스본행 야간열차', 동서문학상(1999), 김수영문학상(2004) 현대문학상(2018)




  이월은 짧아 슬프다. 슬픔이 나를 깨워 순식간에 지나간다. 구정을 시작으로 집안 행사가 줄지어 기다리는 달이다. 입춘이 있고 입춘 지나 아들의 딸이 태어나 기쁨을 주었고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 아들이 그 이튿날 건강한 울음을 울었다. 입덧이 심한 며느리를 위해 애쓰시던 시엄니가 아픈 이월에 일주일 만에 돌아가시고, 며칠 있으면 정월 대보름 하루 전 맛있게 삼색 나물반찬과 미역국을 끓여 상에 올리면 필자의 생일이다. 정월 대보름 첫 둥근 달에게 건강을 빌며 부름을 깨고 달집태우기에 두 손을 모아 한해 액운을 날린다. 일주일을 지나 오래 병상에 계시던 친정엄니가 돌아가시고 비가 오고 슬픈 우수가 지나면 파릇한 새싹이 돋을 때 슬퍼서 바쁜 바빠서 슬픈 이월은 간다.


  삶은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이 속절없이 흘러가듯 자연의 이치로 돌고 돈다. 어려움을 모르다가 조금씩 알아가는 시기를 지나 힘든 상황이 와도 홀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으며 시간을 아끼며 보낸다. 갱년기 증상 중에 잠이 오지 않는 불면증은 이 밤이 새도록 슬프다. '새벽이 나를 깨우고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나를 지켜보는 이 슬픔이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날이 밝아도 침대에서 눕게 만들어 분명 과로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다시 슬픔이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소리 없이 돌고 도는 삶의 수레바퀴 느닷없이 찾아오는 갱년기 증상이 지나면 겨울이 온다. 누구에게나.


-한영채 시인












15.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김수영ㅡ1921 서울 출생, 연희전문 영문과,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시집<달나라의 장난>(춘조사), 저거<거대한 뿌리>, 4.19 이후 창작과 번역등 왕성한 활동 시작, 교통사고로 사망(문인장), 시선집<거대한 뿌리>(민음사), 시선집<시여 침을 뱉어라>(민음사), 시선집<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민음사), <김수영전집-한국현대시문학대계24> (지식산업사), 김수영 문학상 제정, 2001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저녁 8시, 오늘의 뉴스와 타자소리와 기타소리가 봄꽃이 터지듯 어둠을 울린다. 가까이 궁거랑에는 봄밤을 기다리는 벚꽃이 빨갛게 부풀어 하나 둘 폭죽처럼 일어나 밤은 환하고 환하다. 문수로를 지나는 개나리 길은 노랗게 물들어 자동차들도 아기병아리처럼 천천히 지나간다. 산언저리에 붉은 동백과 노란 산수유가 마른 가지 주위를 밝히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문수산 꼭대기를 향하여 붉은 기운이 오른다. 봄이 세상 밖으로 유혹하는 중이다.


  어제는 경주 남산에 다녀왔다. 거친 수피를 가진 나무엔 새싹들이 까칠하게 돋아나고 용장사지를 오르는 길엔 매화가 발그레 피고 소나무 사이 진달래가 한창이며 춘분을 지난 골짜기 물은 졸졸 어린 버들치들이 놀고 있다. 매월당을 찾아 절골 가는 길, 골짜기에 들어서니 움푹 파인 곳에 목 잘린 부처님이 자리하고 계신다. 누가 저 목을 잘랐는지, 누구의 가슴을 치려하는지, 왼손에 약사발을 들고 세상을 치유하러 온 부처, 진달래처럼 처연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봄은 왔는가, 어제나 오늘이나 세상의 어지러운 뉴스가 봄밤을 섬뜩하게 한다. 우리에게 따스했던 날이 또 얼마나 있었던가.


  김수영 시인이 작고한지 50주년째다. 시인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언어가 그의 몸이 그립다. 시인이 살아 있었다면 이 시대를 뭐라고 할까 서둘지 마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영감이여, 봄밤은 서둘러 떠날 것 같다.ㅡ한영채 시인












16.


괘릉


장선희






도래솔이 가마우지가 되는 곳이 있다
굽은 몸들이 서로의 물길
꿈틀대며 열어줄 때
가마우지 깃털 같은 어스름이 상륙한다
그러면 날갯죽지 돛대로 세우고
천 년 잠에서 알 하나 둥실 뜬다
물때를 기다려 달빛 부서지고
날갯짓 소리가 저어가는 어둠,
꿈도 오래되면 둥글어지는지
그 한쪽을 밀치고
희뿌염한 지상의 달이 항해를 시작한다
더 어두워질 때를 기다려
먼 바다로 나서면
긴 목 뽑아 하늘로 자맥질하는 가마우지들
별을 사냥하고도 삼키지 못해
목울대가 가지로만 커가는 도래솔
적막도 오래되면 나무처럼 자라는가
오랜 잠에서 뻗은 가지가
가마우지처럼 긴 목을 늘여 구불텅
천년 묵은 살찐 고요를 삼키고 있다.




장선희-경남 마산 출생, 2012년 웹진『시인광장』제1회 신인상 등단, 2008년 월명문학상




  봄은 들이닥치듯이 한꺼번에 꽃을 몰고 왔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촉촉히 부드러워지자 가지 끝은 바쁘게 물을 길어 올린다. 봄의 식물은 기다림이 일이라 했는데 기다릴 새도 없이 앞다투어 화들짝 동백이 피고 개나리, 진달래도 따라 피고 목련, 모과 목단까지도 기다릴 새도 없이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봄꽃이 하나 둘 피고지면 새싹이 일제히 일어나 가로수인 은행나무, 강변 삼나무도 아래로 부터 연두빛 싹을 돋우고 있다. 모더니즘 시인인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은 시 황무지에서 겨울을 보내며 생명력이 잠든 구근을 틔우는 사월을 잔인하다 하였으나 꿈틀 뿌리를 일깨우는 봄은 위대하다. 그날 소소리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지난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에 희생된 꽃띠 단원고 학생들을 생각하면 사월은 잔인하다고 하지 않을까, 오지 않은 먼 곳을 향하여 기다림이 일인 것처럼 그들은 오늘도, 올해 5주기를 맞아 봄꽃 한아름 놓고 다시 명복을 빈다.


  처용은 어디에서 왔는가, 신화를 따라 쾌릉을 간다. 경주 입구로 들어서자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장 시인은 괘릉을 가마우지처럼 긴 목을 늘여 천 년 묵은 살찐 고요를 삼키고 있다고 한다. 고요 속엔 어제와 오늘이 이어지고 입구에서 처용을 닮았다는 서역에서 온 사신이 사월 연두빛으로 릉을 가두고 있다. 촘촘이 박힌 구불텅한 굵은 소나무가 알 하나를 품어 원성 왕릉의 기운을 키우며 두둥실 달처럼 떠오를 때 달빛 아래 적막한 물길이 흐르고 문수산 기슭 망해사의 안개가 나무처럼 자란다. 저 멀리 처용암 보이시는가, 소소리 바람이 처용암을 때리는 사월의 파도는 오늘도 출렁인다. 시는 신화에서 오고 신화는 시의 역사이기도 하다-한영채 시인










17.


도서관


권기만






사막이 직립해 있는 곳엔 가지 마세요 수천만 페이지 모래바람 펄
럭이는 구릉, 낙타처럼 걸어가는 독서는 젊음을 화르르 쏟아놓곤 해
요 거기 어디선가 별들이 소곤대지만 제 귀는 사르르 스쳐가는 소리
만 읽어요 사막을 횡단한 사람도 첫발을 디딘 사람도 똑같이 발을 헛
디뎌요 무너지기 좋을 만큼 발밑으로 바람이 흘러요 길이 있다는 말
듣고 길 따라 흘러 간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요 갈증이 깊어지
면 모래가 물이 되는 사막엔 가지 마세요 은하수가 불모의 강이라고
읽기 싫어요 낙타가 되긴 싫어요 아버진 오래 전부터 모래였어요 바
람뿐인 아버지를 낙타라고 읽긴 정말 싫어요


사막으로 출근하고 사막으로 퇴근하는 사람들이 발견한 아버지,
수천만 페이지의 사막을 다 건넌 사람은 없어요 사막을 횡단하다 사
막이 되어버린 아버지, 아버질 펼치면 오아시스에서 별 헤고 있는 어
머니, 스스스 미끄러지기만 하는 어머닌 언제부터 유사의 강이었나요


바람을 만나야 길을 얻는 모래에게 바람은 낙타란다 낙타의 등에
올라 타렴 모래처럼 스스스 달려보렴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안이니


타박타박 낙타처럼 걸어가는 활자들,
길 잃으러 사막 간다 길 버리러 사막 간다




권기만-경북 봉화출생, 2012년 <<시산맥 등단>>, 월명문학상, 최치원문학상 수상, 시집『발 달린 벌』




  이팝나무 꽃이 오월 거리를 밝히고 있다. 지난 시월부터 같은 길을 몇 달째 걷고 있다. 태화교를 건너 도서관으로 가는 길엔 아침을 여는 음악이 있고 태화강 잔물결이 푸르게 다가오고 잠시 흥얼거리다 보면 작은 도서관에 도착이다. 오늘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책을 펼치면 검은 글자들이 줄을 이어 어디로 갈까 누구를 어떻게 만날까,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갈까 산으로 갈까, 길을 찾아 나선 누구에게는 도서관은 언제나 희망적이다.




  작은 도서관 주인인 고양이 두 마리가 무심하게 누운 자세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나의 자리를 차지한 고양이는 꿈쩍도 않고 눈을 맞춘다. 가까운 주민들이 손쉽게 책을 이용하고 하교하던 아이들이 잠시 공부방이 되기도 하고 주민들의 쉼터 같은 역할이 되기도 하는 작은 도서관, 안타깝게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작은 도서관에 역량 있는 지역의 작가들이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작은 도서관을 살렸으면 좋겠단 생각이다.


  집 가까이 큰 도서관이 있다. 가끔씩 이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누가 오라고 하지 않아도 도서관은 구석까지 꽉 차 있다. 늦은 공부를 시작한 시인은 도서관이 사막처럼 보인다. 돋보기를 끼고 머리가 지끈거리며 들여다보는 작은 검은 벌레들이 무섭기도하다. 글자들이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고 사막을 횡단하는 탐험가가 되기도 하고 내안의 풍경에 황사가 일고, 그래도 글자들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시인의 의연함이 뚜벅뚜벅 행간마다 걷는다. 타박타박 낙타처럼 걸어가는 활자들, 시인은 길 잃으러 사막 간다. 길 버리러 사막 간다.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길이다. 시인의 길을 나도 따라 나선다.-한영채 시인












18.
달팽이와 나


제인자




텃밭 상추잎에 따라온 달팽이
수돗물 세례 받고 빗장을 지르면
안으로 걸어 닫은 캄캄한 한 채의 집이지요


무른 달팽이보다 되레 놀란 나는
푸른 잎 쌈 싸 먹고 푸른 똥 누는
느리고 답답한 채식주의자


푸성귀 식탁이 나를 부르는 사이
그는 안테나 내밀어 적진을 탐지하지요


무른 달팽이보다 더 무른 나에게
쑥갓깻잎오이가지가 어찌하여
뼈가 되고 힘줄이 되는지요
쌀보리콩수수가 어찌하여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눈물의 기도가 되는지요


한 채의 집을 들어 올려 텃밭으로 가는 나는
느리고 답답한 채식주의자
푸른 잎 갉아먹고 더디 깨닫는
무른 달팽이보다 더 무른 나는




제인자-경남마산 진동출신, 2005년 문예운동 등단, 제 5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2019년 기독신춘문예 수상, 시집<<달의 눈썹>이 있음, 울산기독문인협회 회장




  원동에서 푸르고 실한 매실이 왔다. 효소 담을 매실은 알이 굵고 튼튼하다. 매화가 폈다고 봄소식이 온지 어저께 같은데, 그 사이 비와 햇살과 바람은 분주했나보다. 매화나무는 알을 부풀려 여름 생과일 쥬스처럼 왔다. 보기만 해도 싱그러운 유월이다.


  짙어가는 녹음들 몸 부풀리고 있는 어린 채소들 부지런히 여린 봄을 점령했다. 어제는 채전 밭에서 웃자란 상추와 아욱 쑥갓이 많다며 가까이 사는 언니가 좀 가져가라고 연락이 왔다. 요즘 식탁엔 자주 채식주의자가 좋아할 재료가 차려진다. 나무와 채소엔 벌레들이 생겨나 생식을 즐기는 어린것들의 잔치가 이어진다. 여름이 시작이다. 시인은 가까운 텃밭에 심은 푸성귀에서 우주를 본다. 푸성귀에 따라온 아기 달팽이가 넓은 상추잎 뒤에 붙어 있다. 무농약을 즐기는 시인은 게으르다. 무른 상추 쑥갓과 아욱 오이와 달팽이, 채소 이파리 뒤에서 달팽이가 쉬고 있었을 것이다. 두터운 껍질을 매고 몸 숨기고 있을 때 시인의 발자국에 안으로 목을 당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우주를 들어 올리는 달팽이의 하루가 밀도 있게 그려져 있다. 시인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따라가겠다고 한다.


  설탕과 매실 알을 일대 일로 독에다 넣는다. 뚜껑을 덮어 삼 개월은 잊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숙성이 되어야 새콤달콤 좋은 맛을 낸다. 시도 그러하다. 낮은 곳에서 번개 치듯, 우레가 오듯, 무방비 상태로 어느 날 갑자기 온다. 전율처럼 경험을 통해서 온다. 삭이고 묵혀 다시 물상화 되는 순간 성스러운 기도의 시간이 오고. 시의 집이 생긴다. 그러니까 알이 단단해진다. -한영채 시인
















19.


국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면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중략>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통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枯淡하고 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했던 우리나라의 시인(1912~1995). 본명은 기행(夔行)이다. 평북 청주 출생,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방언을 즐겨 쓴 시들을 발표했다.




  밀국수를 먹던 계절이 왔다. 마당가 늙은 감나무 아래 평상을 펴고 여름 그늘을 즐기던 시절, 식구 많은 집 어머니는 일찍 저녁 준비를 하셨다. 팔이 저리고 어깨가 아프도록 밀가루 반죽을 하고, 굵고 긴 홍두깨로 얇게 밀어 가늘고 고운 칼국수를 빚곤 하셨다. 백철 솥에 멸치 국물을 만든 뒤 감자와 양파, 호박을 넣고 그리고 송송 파를 넣어 자주 너렁국을 끓였다. 아궁이에 콩깍지로 불을 지피면 탁탁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 이마에 땀이 비오듯 했다. 논둑에서 웃자란 쑥을 베와 모깃불로 지폈다. 연기를 마시며 평상에 누워 별자리를 찾던 날 사춘기를 지나던 오빠의 반항기가 펄펄 끓는 너렁국 같았다. 대문 앞 우물은 담장 넘는 소리에 깊은 파문이 일었고 어머니 가슴에도 불꽃이 일었다. 봄을 지나 청춘을 건너는 시간, 백철 솥에 철철 넘치는 너렁국이 어머니를 달래고 있었다.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식구가 많은 집에선 자주 국수를 말아 먹었다. 농가엔 밀을 갈아 시골 방앗간에서 가는 밀국수를 빼, 한 해 양식으로 깊숙이 도장 살강에 저장을 했다. 국수는 비가 오거나 출출할 때 새참으로 먹으면 제 맛이다. 혹은 반가운 손님이 와도 쉽게 상에 오른다. 가끔 어머니 손맛이 그리울 때, 운전 중 차를 돌려 혼자 문수산 아래 할매 집으로 달려갈 때도 있다. 백석 시인은 겨울에 살얼음이 살짝 언 국수를 좋아하나 보다. 얼음을 띄운 한 여름 밤 열무잔치국수는 아 이 맛이야, 먹어 본 사람은 안다. 장마가 지나가는 칠월 어느 날 시인은 쓸쓸한 추억의 잔치국수를 골목 국수집에서 먹는다. 한영채 시인










20.
바다 070


권주열






저렇게 푸른 골대는 처음이다 온통 출렁이는 그물, 경기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해변을 서성이는 관중, 다시 노란 달이 골속으로 팽팽하게 처박힌다. 순간 휘청대는 골문, 하지만 여전히 득점은 알 수 없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대체 경기는 언제 끝나나, 그 골대 속으로 또 한 무리의 별이 쏟아지고 비가 내리고 간간이 방파제 가지런히 신발 벗고 골문을 향해 돌진하는 저 위험천만한 결심까지, 하지만 아무도 그 경기를 따지지 않는다 아무도 현재 스코아를 묻지 않는다 그저 침묵 할 뿐, 그 사이사이 갈매기만 화들짝 옾사이드 옾사이드 호르라기 같은 소리를 내며 날아오른다




권주열-1963년 울산에서 출생했다. 2004년 『정신과 표현』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바다를 팝니다』 『바다를 잠그다』 『붉은 열매의 너무 쪽』 현재 '빈터' '수요시 포럼' 동인






  연일 불볕더위다. 부채이거나 선풍기나 에어컨을 돌려도 덥다. 바다로 풍덩 빠지고 싶다. 저녁을 먹고 바다 이야기가 있는 정자로 간다. 굳이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파도가 다니는 바다는 말만 들어도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오랜만에 바다라는 큰 가방에 모래밭에 누워 꿈이 쏟아지는 한여름의 별의 추억을 담기로 했다. 시인은 저 푸른 골대가 수평선 축구장인가 보다. 더위를 식히는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는듯하다. 멀리 해변 가요제가 열리고 폭죽이 하늘을 향해 쏟아진다. 큰 가방에 저마다 바다 이야기를 넣어 자크로 꽁꽁 묶는다.


  석남사 계곡 물소리는 천상의 목소리다. 가만히 귀 기울이며 입구를 들어서자 밑둥치 굵은 소나무 느티나무 서어나무 굴참나무가 즐비하게 절손님들을 반겨준다. 매미가 목청을 높인다. 바람은 나뭇잎사이로 살풋 지나가며 볼을 간지럽힌다. 산문에 들자 가지산에서 내려온 구름이 그늘을 만들어준다. 탑을 돌며 신선하게 흘러내리는 땀은 구슬처럼 떨어진다. 젊은 여스님의 목탁소리 낭낭하게 절 내 퍼진다.


  휴가를 받은 남편은 서둘러 아침을 먹고 마당 잔디를 깎기 시작한다. 몇 분이 지나자 벌써 구슬땀이 흘러내린다. 풀냄새가 집안에 진동이다. 머리 깎인 마당은 깨끗하게 목욕한 기분, 더위를 식히는 방식은 여려가지다. 입추 지나자 귀뚜리 소리가 높아졌다. 더위는 지금이 절정이다. 이 더위를 한층 즐기고 나면 서늘한 바람도 불어 올 것이다.-한영채 시인














21.
울음의 빛깔


복효근






봄에 온 철새들은
봄 한철 제 목청껏 운다


새에게 울음은
짝짓고 새끼 기르는 데 불가분 관련이 깊겠거니
그처럼 애간장을 녹이는 일이 어디 있으랴
비바람 숭숭한 둥지 하나 틀어놓고
사랑한다, 내 아이를 낳아줘, 여기는 내 처와 내 새끼들이 사는 곳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 외치는 일


뜨겁거나 아주 차갑거나
이불 같거나 가시 같은 그것이 피륙으로 짜여
울음은 봄날을 꽃빛으로 혹은 핏빛으로 물들이기도 하는 것인데


여름 깊으면
그렇게는 요란스럽게 울지 않는다
열병 같은 한 고비 넘겨서였겠거니
그렇다고 새가 울지 않는 것은 아니다
통곡만이 울음이 아니듯이
어느 가파른 곳에 이르렀거나 급한 굽이에서
암중모색 흐느끼는 울음도 있으려니


적금 하나 허물고
보험 하나 해지하여 아이들에게
서울 가까운 곳에 새 둥지 같은 원룸 하나 구해주고 돌아온 날
오랜만에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다녀와서
밤늦게 소주를 마시며
적시는 눈물 같은 것으로
새의 울음도
짙은 녹음 빛깔로 고요히 깊어지기도 할 것이므로










복효근-1962년 남원 출생, 1991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 1995년 편운문학상 신인상, 2000년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 수상,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마늘촛불』등






  언제부턴가 집으로 참새가 한두 마리 오더니 요즘 떼를 지어 온다. 오종종 마당을 배회하다 눈치를 살피다가 스피치 제제 물과 밥알을 훔쳐 먹는다. 때로는 현관 앞 소나무 분재에 올라앉기도 하고, 쥐똥나무에 앉았다가 동백나무 푸른 잎 사이에 몸을 숨기다가 모과나무에 걸터앉기도 한다. 그 사이 마당 가장자리에 제제와 친구가 된 것 같다. 컹컹 지져대던 제제는 물과 밥알을 내주며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시인은 새의 울음도 짙은 녹음 빛깔로 혹은 고요히 깊어지기도 할 것이라고 한다. 녹음사이 제제와 새의 울음이 제제젝 섞이고 있다. 그 사이 새의 수가 많아졌다. 새떼들은 젝젝 거리며 제제 밥을 먹는다. 폴폴 날아다니는 그 떼들에게 나도 쌀알을 한웅큼 줬더니 참새 떼 한 부대가 집 주변을 재잘거린다. 새 부리가 줄줄이 현관으로 겨누며 눈알이 반짝인다. 어느 날 옥상으로 가보니 하얀 새똥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새의 울음이 흰 빛인 걸 이제야 알겠다.


  귀뚜라미 울음이 가을을 몰고 온다. 시간을 알려 주는 귀뚜라미는 새벽부터 다양한 울음으로 귀를 열게 한다. 가을장마가 시작되고 백로 가까이 귀뚜라미 소리 높아졌다. 며칠 구름이 잔뜩 끼더니 마당 그늘엔 풀들이 웃자라고, 저 멀리 바다엔 비바람으로 쥐불놀이를 하듯 황소 같은 눈망울이 오르고 있다. 사과나무가 흔들린다, 배가 지상으로 툭툭 떨어진다. 저 넓고 푸른 배들평야 벼이삭이 깡그리 누울랑가. 태풍이 온다고 미리 걱정이다. 링링, 돌돌이 휘몰이로 오는 바람아, 몇 계절을 보내며 정성껏 키운 것들이 블랙홀이 되면 큰일이다. 기도문을 왼다. 부디 만추의 설움과 농부의 울분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다행이다, 링링은 지나갔다. 당나라 문장가 한유는 “만물은 평정을 얻지 못하면 소리 내 운다.” 초목이든, 물이든, 금석이든, 인간이든 모든 만물은 외부사물과 부딪치게 되면, 이로 인해 마음이 평정하지 못해 운다고 한다. 울음의 빛깔은 다양하다. 작가의 울음은 어떤 것일까, 그 울음은 말이 되고 글이 되고 글의 울음이 진정일 때 그때 깊은 울림이 온다. 진정한 울음의 빛깔을 내고 싶은 가을저녁이다. -한영채 시인


















22.


옥상의 가을


이상국










옥상에 올라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들어 있다
피는 따뜻하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이상국 :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에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동해별곡』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시선집 『국수가 먹고 싶다』 등이 있다. 2012년 제24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수확의 계절에 산등성 달이 떠 있다. 무량한 시간을 지나는 문상 길이다. 손에 잡힐 듯 가슴을 열어 품고 싶은 저 풍성함이 여유로울 것 같지만 외롭고 쓸쓸한 걸음으로 읽힌다. 보름으로 가고 있는 달은 홀로 산을 걷는 중이다. 쓸쓸한 가을 환절기에 세상을 떠나는 소식이 오늘따라 잣다. 그 예쁜 설리도 가고.....가을을 보내는 것은 기쁘거나 슬프거나 삶의 계절을 넘기는 이별의 아쉬움이나 아픔도 따라온다. 가을이 잘 보이는 옥상을 좋아하는 시인은 삶의 가을을 지나면서 달밤에 깨을 터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우리집 옥상에도 가을이 왔다. 그 따갑던 햇살이 많이 물컹해졌다. 노란 물탱크 아랫부분을 잘라 흙을 부어 만든 텃밭에 고추 몇 포기, 가지 두어 포기, 자생한 개머루 그리고 상치까지 싱싱하고 순한 손 쉬운 미니농장이다. 또 저절로 터를 잡은 자소엽이 붉은 이파리를 계절만큼 키우더니 마른 대를 세우고 생명을 다하고 눕는 나름의 아름다운 수확도 있다. 계절 바뀌고 흙을 다시 고르고 알이 실한 쪽파를 심는다. 링링이 가고 타파와 미탁이 지나가자 물을 듬뿍 먹은 뿌리는 싹을 튀워 파란 얼굴을 내민다. 가을 햇살은 느리게 다녀간다. 텃밭에는 흙의 피가 따뜻하게 돌 것이다. 옥상에서 계절의 끝과 시작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기억의 소리가 옥상으로 지나간다












23.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1936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55년 문화예술 '낮달' 등단 수상, 시집으로 '원격지', '산읍 기행', '시제', '농무' 등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시학(詩學) 해설서인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973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 작가상, 2009년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하였다.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입동 무렵이다. 걷기 좋은 키다리 달이다. 태화강변의 홀로 서 있는 황새의 긴 다리 같기도 한 11월은 가끔 몸을 흔드는 갈대의 계절이기도 하다. 올해 가을은 유난히 따뜻하다. 햇살이 손에 잡힐 듯 살랑바람이 불어오는 강변엔 하늘은 높고 푸르고 뭉게구름도 한가롭게 강을 건너고 있다. 다시 만보를 시작한 지 두어 달이 가까워진다. 가끔 저려오던 무릎과 운전 탓인지 허리 통증이 있었는데 적당한 보폭으로 걷기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나자 통증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작년에도 만보행이 있었다. 잔 근육을 이용하는 백일 만보 걷기 프로젝트는 중간에 다른 일이 끼어들어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시작한 걷기는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는 동시에 필자를 부지런하게 한다. 아침부터 오늘은 어디로 갈 것인지, 목표를 정하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기온이 좀 내려간다고 뉴스에서 말한다.


  겨울로 들어서는 입동을 지나며 추워지기 전에 가을을 조금 더 느끼고 싶다, 서둘러 명촌 갈대숲으로 간다. 기온이 살짝 내려갔는지 하늘이 더 높고 파랗다. 살갗에 부딪치는 청량한 알싸함이 있다. 강폭이 넓어질수록 물빛이 맑고 짙은 감청색이 돈다. 강가 낚시터에는 가끔씩 환호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햇볕에 부딪히는 잔물결은 은빛비늘이 움직이는 것 같다. 강에는 물고기들이 튀고 다리 아래 잿빛 황새는 오수를 즐기고 있다. 청둥오리 떼들도 바쁘게 물살을 가르고 하늘에는 갈 까마귀 떼들이 무리 지어 날아가는 태화강변은 자연이 주는 절창의 그림이다.


  태화강과 동천강이 마주치는 두물머리에는 삼각주가 있고 다리 건너 끝이 보이지 않는 은빛 잔물결의 갈대숲이 나온다. 갈대숲에서 여기저기 참새들이 포르륵 날아오른다. 숨어있던 언어의 파편들이 집을 지어 제제젝 이야기하다 날아오르는 것 같다. 갈대는 몸을 흔들어 울고 있다는 시인은 여기 오시라! 그들 허리춤에서 몸을 비비며 은밀한 이야기를 듣는 새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무리지은 은색 갈대는 솜이불 같다. 바람이 불면 우우 소리를 낸다. 세상살이가 힘이 들 때 갈대밭에서 실컷 울어도 좋겠다. 우리의 삶과 가까운 슬픔과 기쁨, 높고 낮음 그리고 자연의 조화로운 음양의 공존을 가진 최고의 아름다운 곳이 여기다.-한영채 시인














24.


비를 발음하는 괘

김려원





모든 달(月)에는 껍질이 있다
껍질 위에 껍질을 내리치면 텅 빈 소리가 난다
텅 빈 소리를 쫓아온 비도 흩뿌리는 관이 있을 것이고
그 관 안에 줄기가 들어 있을 것이다.

오늘의 오관 떼기에서는
우산을 쓴 손님이 찾아왔다
비는 가장 먼 곳을 달려온 음악,
오동잎을 노래하는 젓가락 장단에
양철봉황새는 들썩이며 춤춘다.

비의 속도라는 말은 타들어가는 저수지와
미처 걷지 못한 빨래가 젖는 시간
그녀의 스커트가 펄럭거렸다, 라는 모란꽃 같은 말

화투장들은 왜 달력이 되지 못할까
날짜가 없는 달이라니,
내가 선호하는 방식이라서
날짜 없는 매일을 달밤 없이 점친다
내일은 상냥한 국화주를 따를 것이고
님은 글피쯤 벚꽃무늬 봇짐을 싸들고
송학같이 속삭여 올 것이므로

내달의 껍질을 다시 내리치면 한달음에 비
우산 쓴 님이 붓꽃으로 들어서고 있다.



△김려원: 1966년 경남 하동 출생. 2017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



  12월 이 해 마무리 시간이 다가옵니다. 마무리는 또 다른 시작입니다. 어제는 분홍 장미를 10송이 샀습니다. 가슴에 품어 따뜻함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한 해를 열심히 달려온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또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이기도합니다.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어린 친구들의 가슴에도 보내고 싶고, 새 일자리를 찾은 젊은 친구에게도,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위해 열심히 일한 퇴직자분들께도 분홍 꽃다발을 보내고 싶습니다. 겨울이면 문학계에도 한 해 마무리 하는 축하할 곳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어제는 가까운 지인이 소설로 등단을 하고 그 힘겨운 터널을 벗어나게 되었는데 정작 글쓰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무궁한 발전을 빌며 분홍 꽃다발을 가슴으로 내밉니다.



  시간은 빠르게 소나기처럼 속도를 가집니다. 1월의 껍질을 벗기기도 전에 매화가 피고, 이어 목련과 목단 가지에 새소리가 납니다. 오월 오동꽃은 또 얼마나 예쁜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뒤돌아보면 시간은 텅 빈 껍질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시간은 달립니다. 여름 우산을 쓴 지구인은 보름달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시인은 묻습니다. 화투장들은 왜 달력이 되지 못할까요. 날짜가 없는 달이라니, 누구나 날짜 없는 매일 앞날을 점치고 싶습니다. 문자로 오는 오늘의 운수는 언제나 나의 앞날을 점치기도 합니다. 오늘은 맑음이네요. 점자로 그냥 기분이 좋아집니다. 오늘은 두터운 외투를 입고 나가세요. 오늘은 좀 조심을 해야겠군요. 이런 일상들을 시간이 끌고 갑니다. 시간 속에 내가 있습니다. 나의 껍질 속에 알곡은 얼마나 있을까요? 오늘도 시간의 흐름을 재고 있습니다. 오늘을 보내고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듯이.
 -한영채 시인













25.
반구대 암각화/


한영채






황사가 뿌연 날
태초의 뿌리를 다시 찾는다


나의 뿌리는 바다에서 왔다
뿌리로 가는 길을 묻고 또 물으며
골짜기 산모퉁이 돌아
백학이 놀던 반구대 바위로 숨어들었다


햇살이 휘어진 바위틈에 창살을 꽂아
멧돼지와 사슴이 농사를 짓는
바닷물 따라 고래가 넘쳐흐르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흥을 돋우며
심장을 파듯 바위에 글자를 새겼다


바위 글자는 물속을 헤매다가
바람의 말 전설처럼 전하다가
숲으로 산 지 수천 년
민낯으로 나온 지 수십 년


시간은 단단해지고 자화상은 엷어졌다
물이 필요하다 혹은
물로 나의 몸이 해체 된다
사람들이 물과 다툼을 벌이는 사이
온몸이 콜록거린다


다시 찾은 나의 뿌리는 
슬픈 고백을 안은 음각의 세계


뿌리는 살아 있다






다시 뿌리를 찾다/한영채




 
   3월 바람이 순하다. 황사가 뿌연 날 나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 태초에 백학이 놀고 휘돌아가는 물이 있는 혼펠스 지형에 터를 잡은 나의 뿌리는 바다로부터 시작되었다. 발견된 지 올해 50주년을 맞은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가 대곡천에 자리 잡고 있다. 강을 넘어 바닷물이 이곳까지 오고 갔다니 고래가 드나들고 사람들은 나무배를 만들어 고래 채집에 나섰다는 뿌리들, 수천 년 시간을 과거와 미래가 주고받는 말(言)의 그림이 암각이다. 



  풍경이 수려한 반구대 아래 암각화는 희미하게 살아있다. 발걸음을 옮기며 뿌리에 대한 질문이 가슴에 가득했다. 나와 반구대의 인연은 오래되었다. 1965년에 처음 반구대가 발견되고 자연훼손을 하지 말자는 이유로 환경단체에 동참을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골짜기에 박물관은 세워졌고 아이러니하게도 울산박물관과 대곡박물관에 3년 근무를 하게 되는 운명적인 시간을 가졌다. 골짜기 곳곳을 누비는 발품과 기록의 시간, 염포 소금장수로 화장산을 넘은 98세 박 할아버지의 어려웠던 증언이 생생하게 기억나고 반구대 아래 정몽주 사당을 취재하러 바지를 무릎까지 겉어 붙이고 차가운 강물을 건넜던 시간들이 모두 뿌리를 찾기 위함이었다.


  암각화 박물관에 주차를 하고 암각화 가는 길에 한실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한실 마을은 반구대가 생기면서 이곳에 사는 분들이 이주한 곳이기도 하다. 한실 마을로 가는 길 보리밭엔 푸름이 가득하다. 안마실은 화장산에 둘러 쌓여 어머니 뱃속처럼 평온하다. 언덕엔 바람이 등을 떠밀었고 겨우내 얼었던 골짜기에 물소리가 피처럼 흐르고 산등성이엔 이미 봄을 알리는 꽃불이 났다. 어둠에서 오래 얽히고 울퉁불퉁 살아 견딘 흘러내린 나무뿌리가 길섶 흙더미에 햇살을 받고 있다. 벌거벗은 뿌리를 보며 살아가는 일이 어찌 쉬운 일만 있었겠느냐 참고 여기까지 왔구나, 반구대 암각화 앞에 서자 고단한 마음이 풀어진다. 물 건너 멀리 바위그림을 망원경으로 둘러봐도 고래는 보이지 않는다. 나의 뿌리는 상상 속에 가득하다. -한영채 시인


2021년<울산문학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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