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끄러미 / 문태준
한낮에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이 뾰족한 들쥐가 마른 덩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갈잎들은 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오늘은 일기(日記)에 기록할 것이 없었다
헐거워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다
나는 식은 재를 손바닥 가득 들어 올려보았다
- 문태준, 『그늘의 발달』(문학과지성사, 2008)
물끄러미 / 정호승
당신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에 비껴 뜬 보름달이 나를 바라보듯
풀을 뜯던 들녘의 소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듯
선암사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새가
홍매화 꽃잎을 쪼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듯
대문 앞에 세워둔 눈사람이 조금씩 녹으면서 나를 바라보듯
폭설이 내린 태백산 설해목 사이로 떠오른 낮달이 나를 바라보듯
아버지 영정 앞에 켜둔 촛불이 가물가물 밤새도록 나를 바라보듯
물끄러미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눈길에 버려진 타다 만 연탄재처럼
태백선 추전역 앞마당에 쌓인 막장의 갱목처럼
추적추적 겨울비에 떨며 내가 버려져 있어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 속에는
이제 미움도 증오도 없다
누가 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사랑보다 연민이 있어서 좋다
- 정호승,『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물끄러미 / 김경미
반려견의 얼굴을 한참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반려견들은 일단 긴장하면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마구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곧 성격 따라서 세 종류의 반응을 보인다
진짜로 뭔갈 잘못한 듯이 울거나
그만하라는 듯이 거꾸로 짜증을 내거나
꿈쩍도 안하고 똑같이 계속 마주 봐서
결국 이쪽에서 웃게하거나
세가지 반응을 보인다길래
우리 집 반려견은 어떨까
앞에 가서 물끄러미 보기 시작했는데
녀석의 반응 이전에
내 안의 어떤 추억 하나가 먼저 뛰어나온다
데이트할 때마다,
‘너와 데이트를 하다니 믿겨지지 않는다’면서
한참씩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람,
지금은 식탁 맞은 편에서
내 입가에 뭐 묻었을 때나 놀리느라 물끄러미 쳐다보지만
내게도
사랑에 벅차서 날 얼굴 닿도록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다고
추억이 한 걸음 먼저 반응을 한다
- 김경미, 『쉿,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6)
물끄러미 / 길상호
물끄러미라는 말
한 꾸러미 너희들 딱딱한 입처럼 아무 소리도 없는 말
마른 지느러미처럼 어떤 방향으로도 몸을 틀 수 없는 말
그물에 걸리는 순간
물에서 끄집어낸 순간
덕장이 장대에 걸려서도
물끄러미,
겨울바람 비늘 파고들면
내장도 빼버린 배 속 허기가 조금 느껴지는 말
아가미 꿰고 있는 새끼줄 때문에
너를 두고 바다로 되돌아간 그림자 때문에
보아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말
- 길상호,『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사, 2010)
물끄러미 / 김주대
양평동 무궁화다방 박양이 커피를 배달하기 위해 깜찍한 오토바이에 올라앉아 시동을 걸자 대정기공 공원들이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다 숟가락을 멈춘 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영라사의 목 없는 마네킹이 가봉한 상의를 걸친 채, 놀이터 화장실 입구 다리가 불편한 노인이 부서진 의료용 지팡이를 짚고 선 채, 박 양의 버들허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시선을 받던 박양의 허리가 가늘게 흔들리더니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물끄러미의 사이를 빠져나간다 털빛 좋은 비둘기들이 가을볕으로 날아오른다 무궁화다방 박양은 미스코리아는 아니지만 미스양평동 정도임에는 분명하다
- 김주대, 『그리움의 넓이』(창비, 2012)
물끄러미에 대하여 / 이정록
모내기를 마친 논두렁에
왜가리가 서 있다, 이 빠진
무논의 잇몸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마꾸라지나 개구리를 잡으려다
어린 벼 포기를 짓밟은 것이다
진창에 처박힌 벼 이파리의 안간힘 때문에
몸살을 앓는 봄 논,
물은 저 떨림으로 하늘을 품는다
하늘을 따라 키 큰 미루나무가 문안 간다
쇠뜨기도 척추 한 마디를 뽑아 수액을 건넨다
물벼룩과 개구리와 어린 모가
가 닿아야 할 밥의 나라, 세상에
써레질을 마친 논만큼 깊은 것이 있으랴
식도를 접고 벌받듯 서 있는 외발에게
많이 저리냐? 두렁 쪽으로 물결 일렁인다
어린 순 부러지는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
발길 사나운 것이 삶이라서, 늘
배부른 다음이라야 깨다는 나여
물끄러미, 개구리밥을 헤치고
마음속 진창을 들여다본다
눈물 몇 모금의 웅덩이에 흙탕물이 인다
언제 눈물샘의 물꼬를 열고
깊푸른 하늘을 들일 수 있을까
정처만이 흙에 뿌리를 박는 것,
마음의 바닥에 물끄러미라고 쓴다
내 그늘은 얼마나 오래도록
물끄러미와 넌지시를 기다려왔는가?
물꼬 소리 도란거리는 마음과
찬물 한 그릇의 눈을 가질 때까지
나는 왜가리 발톱이거나
꺾인 벼 이파리로 살아가겠지만, 끝내
무논의 물결처럼 세상의 떨림을 읽어내기를
써레처럼 발목이 젖어 있기를
- 이정록, 『의자』(문학과지성사, 2006)
물끄러미 칸나꽃 / 고영
혼자 남겨진 저녁은
가슴에 새긴 상처보다 더 빨리 와서 슬펐다.
그날 나는 울먹였던가, 울먹이다가
끝내 눈물과 화해했던가.
칸나꽃 피었다. 칸나꽃은 언제나
누군가 떠난 자리에 핀다.
칸나꽃 필 때쯤이면 나는 언제나 열병을 앓았다.
누군가 자꾸 슬픔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어제 떠나간 사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늘 남겨진 몰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일 곱씹을 후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낙엽 한 장의 팔랑거림마저 견디지 못할 내 가벼운 육신에 치를 떠는
연희동의 어느 쓸쓸한 저녁
칸나꽃 다 지기도 전에 칸나꽃 향기는 떠나고
발코니에 앉은 종소리 다 듣기도 전에
성당문은 굳게 닫힌다.
칸나의 슬픔
마리아의 눈물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떠난다.
24시 편의점에 불은 꺼지고
향기 없는 모과는 더 깊이 찌그러진다.
- 고영,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문학세계사, 2009)
오늘은 좀 나을 거야 널 보낸 어제보다
누구나 이별은 하잖아 걱정 마
사실은 나 자신 없어 니가 없는 하루는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너처럼 보이는 걸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울고 말았어
사랑했잖아 나 밖에 몰랐잖아
왜 날 이렇게 아프게 해
나 없이는 못 산다 했잖아
아냐 너 때문이야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 모두 내 잘못이야
이제 사랑 같은 건 나 하지 않을래
두 번 다시
밤새도록 울기만 했어 미치도록 아파서
못 견딜만큼 난 니가 너무 그리워서
사랑했잖아 나밖에 몰랐잖아
왜 날 이렇게 아프게 해
나 없이는 못 산다 했잖아
아냐 너 때문이야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 모두 내 잘못이야
이제 사랑 같은 건 나 하지 않을래
사랑 따윈 모른 채 산다는 게
없던 일로 한다는 게
정말 넌 그게 되니
사랑했는데 우리 좋았었는데
다른 사랑과 달랐는데
왜 날 흔한 사람을 만들어
니가 떠날 거라면 돌아올 거 아니라면
작은 기대조차 주지 마
너에게 쉬운 사랑이 나 한 사람에겐
전부니까
[출처] 주제별 시 모음 391. 「물끄러미」|작성자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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