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를 풀다 외 4편
김양아
그 숲 한 귀퉁이가 무너져 있다
뿌리만 남겨둔 채 떠난 여행
어디에 닿아 무엇으로 환생했는지 알 수 없다
평생 붙박이로 살았던 그 자리
나이테를 공유했던 몸통은 떠나고
낮게 베어진 자리
둥근 언어로 새겨진 기록만 남았다
빽빽한 간격으로 견뎌낸 추위와 단단하게 박힌 옹이로
치열했던 생의 밀도를 읽는다
LP판 한 장 올려놓은 턴테이블
흑백영화의 자막에 흘러내리던 빗물처럼
지직거리는 잡음마저 아련한 그 시간 속으로 감겨든다
오래된 레코드판이 풀어내는 무성한 계절의 노래
가지런한 동심원으로 번진 그루터기를 보며
묵묵하게 살아낸 연륜을 헤아려본다
큰 그늘 드리웠을 나무
남겨진 굵은 밑동에서 한 생애를 추적한다
포구 바닥
깊은 바닥을 훑던 그물,
갓 출하된 기운이 어시장 바닥에서 퍼덕인다
끌려온 바다는 손가락 암호로 값이 결정되고
스티로폼 상자마다 경매된 바다가 출렁인다
무릎 앞에 놓인 올망졸망한 바다들
하루치의 호흡이 뽀글뽀글 물방울로 올라온다
포구에서 늙은 노인
짭조름한 해풍을 말아 국수 한 그릇 빈속에 밀어넣는다
지금은 해감의 시간,
출항한 배를 기다리다 붙박이가 된 노파도
잠시 가쁜 숨을 고른다
오래 붙들고 살아온 바닥은
악착같이 버티는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그날 팔아치워야 할 하루가 바닥 날 때까지
노인은 젖은 바닥에 앉아 축축할 것이다
차곡차곡 접힌 바다를 펼쳐놓은 난전,
고무함지를 넘어온 낙지가 빨판으로 바닥을 붙들고
소금기 절은 바닥들이 저마다 목청을 높인다
마트에 핀 꽃
계절이 뒤섞였다
실물 보다 화사하게
박제된 웃음을 띠고 멈춰버린 조화들
지루한 기다림을 들고
마트 코너에서 불빛에 시들어간다
뿌리가 거세된 불임의 그녀들
먼지 낀 이파리에 상표를 매달고 있다
입술 한 번 적시지 못한 채
삶도 죽음도 아닌 건조한 날들
묶여있는 시간의 태엽을 풀 수는 없을까
날마다 탈출을 기대하는 꽃들
이곳을 벗어나 식탁이나 벽에서 활짝 피고 싶다
정교하고 섬세한 손끝에서 피어난 색색의 꽃들
꽃의 유전자 한 점 들어있지 않아
철을 따라가는 낙화도 없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가격표를 달고
제자리에서 늙어가는 것이다
개미떼의 속도
거북이 등짝 같은 가방 하나
지열 후끈한 땅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여름 한낮의 땡볕 아래 아이의 호기심이
자동차 바닥 그늘에 숨은 고양이를 부른다
쪼그려 앉아 들여다볼 일이 많았던 그때,
구름은 느리게 흘러갔다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가는 개미떼의 속도로
한나절을 보내기도 하고
풀밭에 무리지은 토끼풀로 하루를 엮기도 했다
세상은 점점 눈높이를 밀어 올리며
긴 눈맞춤은 사라져버렸다
땅에 닿던 눈높이가 허공을 딛고 오를수록
무심히 지나치거나 모른 척 밟고 다니는 것들이 늘어났다
휴가철 버려지는 애완견이 많다는 저녁뉴스,
어두운 고속도로에 남겨두고 승용차들이 달아났다
창밖으로 던져버린 양심을 뒤따라 달리는 애완견
주인을 믿고 제자리를 맴돈다
불안한 숨소리 곁으로
아찔한 바퀴들이 질주하고 있다
벽장의 시간
그 자궁 속에 웅크려 잠든 적이 있다
밖을 피해 기어들어간 어둠의 품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일곱 살을 찾느라고 소란스러운 바깥 따윈 잊고
까마득히 먼 잠에 빠져들었다
벽장문이 열리고 쏟아지던 환한 빛,
안도감에 끌어 안겨 한나절이 무마되었다
시침을 떼고 있는 벽의 마음을 열면
버리지 못하고 감춰둔 것들이 쏟아진다
수시로 빛과 어둠이 들락거리는
나 역시 비밀스러운 벽장,
마음의 주머니마다 묵은 시간의 먼지가 쌓여있고
눈을 피해 밀어 넣은 것들
눅눅한 잠에 잠겨있다
갑작스런 비를 피해 뛰어든 밑동 굵은 느티나무,
가슴께 구멍이 뚫린 우묵한 벽장과 마주쳤다
얼마나 많은 목숨을 품고 있을까
묵묵히 내어준 빈자리가 고요하다
김양아 시인
서울 출생.
한국외대 교육대학원 영어교육과 졸업.
2014년『유심』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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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현실 너머를 읽는 시적 인식의 깊이
최연수(시인. 평론가)
순간적이며 압축적인 장르가 시다. 서사성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기에 시는 정서적 강렬성의 일부만으로도 시적 요소를 충분히 갖춘다. 이때, 시적 강렬성의 요인이 되는 것들은 생각을 정반대 방향까지 회전시켜 끌어온 시상들이다. 낯선 비유로 인한 시적 긴장이 독자를 극도의 여운에 들게 해 고도의 시적 매력에 빠지게 한다. 연과 연사이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시의 극적 효과는 시의 분명한 주제를 안겨준다. 또한 여운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데, 이는 시인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적 기법이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낯설게 쓰기로 명명하곤 한다.
그러나 낯설게 쓰기란, 시적 긴장을 위한 비유법이지 엉뚱한 비약이나 해석을 가로막는 단절이 아니다. 비유는 시의 대표적인 기법으로서 두 사물의 결합에 따른 의미론적 변용작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의 두 사물이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에 따른 의미의 변용은 신선할수록, 낯설수록 시적 긴장이 고조된다. 유사성을 도외시 할 수 없지만 멀리서 차용해오는 비유가 더 강렬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비유를 쓰는 것도 결국은 시에 활력과 긴장을 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현대시들이 유사성을 기반으로 하는 치환은유의 비유법보다는, 전혀 생소한 이미지들의 돌연한 결합 혹은 장면의 급격한 전환의 비유법인 병치은유를 즐겨 차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인접성이나 유사성의 비유에서 오는 시적 감흥의 느슨함보다는 낯선 장면이 주는 신선함이 선명한 이미지의 효과를 획득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일반적 견해나 관습을 초월한 긴장이 필요하다. 상황이나 사건을 포착, 그 순간의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를 자유롭게 병치시켜야만 한다. 시적 화폭에 자유롭거나 낯설게 그린 그림이 자연스럽게 감동으로 전환되게 만드는 김양아 시인의 시세계가 자못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숲 한 귀퉁이가 무너져 있다
뿌리만 남겨둔 채 떠난 여행
어디에 닿아 무엇으로 환생했는지 알 수 없다
평생 붙박이로 살았던 그 자리
나이테를 공유했던 몸통은 떠나고
낮게 베어진 자리
둥근 언어로 새겨진 기록만 남았다
빽빽한 간격으로 견뎌낸 추위와 단단하게 박힌 옹이로
치열했던 생의 밀도를 읽는다
LP판 한 장 올려놓은 턴테이블
흑백영화의 자막에 흘러내리던 빗물처럼
지직거리는 잡음마저 아련한 그 시간 속으로 감겨든다
오래된 레코드판이 풀어내는 무성한 계절의 노래
가지런한 동심원으로 번진 그루터기를 보며
묵묵하게 살아낸 연륜을 헤아려본다
큰 그늘 드리웠을 나무
남겨진 굵은 밑동에서 한 생애를 추적한다
―「나이테를 풀다」
시 속에 등장하는 시인은 주체가 아니다. 그저 관찰자로서만 존재, 시적 대상은 자연스럽게 제 몫을 이루어낸다. 그러나 기실 시인이 시에 개입하지 않는다 함은 시 속 정서와 거리를 둔다는 것, 독자의 정서에 적극 개입하기 보다는 느낌이나 정서마저도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대상의 이면에 담긴 상황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 의미를 길어 올리는 것은 상투성, 토속성, 일상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자의식의 다양한 풍경, 혹은 단면들은 시인의 시적 미학의 장점이 된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 중의 하나가 관념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적막, 슬픔, 그리움, 추억 등 우리의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정서나 감정을 사물을 빌려와 드러내는 형상화는 접근이 용이한 만큼 고도의 시적 기법을 필요로 한다. 관념은, 말처럼 쉽게 극복되는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고 관념을 무조건 등한시 하거나 나쁘다 할 수는 없다. 다만 추상적 관념을 결코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말라는 것, 새로운 윤곽을 만들어 보이지 않는 관념을 보여주는 것, 바로 형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적 대상인 관념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수 사항이다. 시적 형상화 혹은 낯설게 쓰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상상력인데 김양아 시인은 ‘바닥’에서 연관되어 나오는 정서내지는 의미를 여러 대상을 차용해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시적 대상의 선택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시적 표현의 고민인 것. 시란, 존재론적 고통에 대한 몸부림이자 죽음과 사랑과 절망 등을 고스란히 사진 찍듯 가져오는 것 같아도 그것은 엄연히 다를 옷을 갖춰 입고 다른 모양으로 다른 감정을 만들어낸다. 절망해 넘어지고 죽어가는 것들을 일으켜 세워 상처를 치유하는 것, 삶을 노래하는 것이 시지만 아름다움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아픈 부분이나 거친 부분도 거리낌 없이 차용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일상에 끼어드는 불순물을 걸러내고 그것을 다시 고도의 시적 아름다움으로 정화했다는 점에서 시는 일상 그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가벼움도 무거움도 아닌 것이라지만, 바닥을 노래하는 시인의 시는 일상에서 일상을 넘어선 세계를 촉촉한 오감의 촉수로 더듬어낸 것이다. 시란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실체의 것이 아니라 유동하고 끝없이 변화하는 것, 세상의 어떠한 내용의 것이든 시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시 아닌 것이 없어서 치열한 삶인 바닥은 시의 좋은 소재가 된다. 어떤 대상이건 재빠르게 간파하고 파헤치는 시인의 손에 의해서, 바닥은 본래의 본성을 넘어 다양한 의미의 형태로 탈바꿈 한다.
깊은 바닥을 훑던 그물,
갓 출하된 기운이 어시장 바닥에서 퍼덕인다
끌려온 바다는 손가락 암호로 값이 결정되고
스티로폼 상자마다 경매된 바다가 출렁인다
무릎 앞에 놓인 올망졸망한 바다들
하루치의 호흡이 뽀글뽀글 물방울로 올라온다
포구에서 늙은 노인
짭조름한 해풍을 말아 국수 한 그릇 빈속에 밀어넣는다
지금은 해감의 시간,
출항한 배를 기다리다 붙박이가 된 노파도
잠시 가쁜 숨을 고른다
오래 붙들고 살아온 바닥은
악착같이 버티는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그날 팔아치워야 할 하루가 바닥 날 때까지
노인은 젖은 바닥에 앉아 축축할 것이다
차곡차곡 접힌 바다를 펼쳐놓은 난전,
고무함지를 넘어온 낙지가 빨판으로 바닥을 붙들고
소금기 절은 바닥들이 저마다 목청을 높인다
―「포구 바닥」
바닥을 읽는 시인, 바닥에서 남이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을 발견해내는 김양아 시인에게 ‘포구 바닥’은 삶의 터전이자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희망으로 갈아입은 다른 그 무엇이 되기도 한다. “깊은 바닥을 훑던 그물”이 “갓 출하”한 바다를 펼쳐놓은 “어시장 바닥”은 “하루치의 호흡이 뽀글뽀글 물방울로 올라오”는 곳, “스티로폼 상자마다 경매된 바다가 출렁”이는 곳이다. 좌판을 놓고 앉은 “무릎 앞에” “올망졸망한 바다들”이 있는 곳이다. 포구 바닥은 삶의 현장, 그래서 “포구에서 늙은 노인”이 있고 “짭조름한 해풍을 말아 국수 한 그릇 빈속에 밀어 넣는” 옹색한 하루가 있다. 높이가 아닌 수평, 그것도 바닥을 오래 붙들고 살아가는 곳, “악착같이” 버텨온 곳, “축축”한 곳이다. “그날 팔아치워야 할 하루가 바닥날 때까지” 견뎌야하는 “난전”은 “고무함지를 넘어온 낙지가 빨판으로 바닥을 붙들고” “저마다 목청을 높이”는 바닥은 바로 삶인 것이다. 시인은 사라져가는 시간이나 기억의 흔적들을 따라가며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복원해보려 애쓴다. 현장성을 말끔히 소멸하지 못하는 기억은 기억을 끊임없이 현재화함으로써 그 흐름을 정지시킨다. 시적 시간은 시인이 기억을 얼마나 지속하는가와 관련이 깊다. 효율성만을 추구하거나 속도를 가치로 여기는 현실의 변화를 벗어나는 힘은 기억의 지속성이지만 시인이 간직하고자 하는 기억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시간의 연속성에 따라서 희미해지고 때로는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흩어지고 지워지고 때로 조각난 기억들을 모은 시 속에는 여러 시간들이 흘러가기도 하고 또 고여 있어서, 그 시간을 표현한 색깔은 아련한 빛깔이 되는 것이다.
거북이 등짝 같은 가방 하나
지열 후끈한 땅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여름 한낮의 땡볕 아래 아이의 호기심이
자동차 바닥 그늘에 숨은 고양이를 부른다
쪼그려 앉아 들여다볼 일이 많았던 그때,
구름은 느리게 흘러갔다
과자 부스러기를 물고 가는 개미떼의 속도로
한나절을 보내기도 하고
풀밭에 무리지은 토끼풀로 하루를 엮기도 했다
세상은 점점 눈높이를 밀어 올리며
긴 눈맞춤은 사라져버렸다
땅에 닿던 눈높이가 허공을 딛고 오를수록
무심히 지나치거나 모른 척 밟고 다니는 것들이 늘어났다
휴가철 버려지는 애완견이 많다는 저녁뉴스,
어두운 고속도로에 남겨두고 승용차들이 달아났다
창밖으로 던져버린 양심을 뒤따라 달리는 애완견
주인을 믿고 제자리를 맴돈다
불안한 숨소리 곁으로
아찔한 바퀴들이 질주하고 있다
―「개미떼의 속도」
바닥은 그저 바닥일 뿐이라고, 높이에 치중하고 속도를 섬긴 결과는 참담하다. 눈빛을 마주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거나 모른 척 밟고 다니는 것들”이 “불안”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아찔한 바퀴”들은 “질주”를 선호하고, “세상은 점점 눈높이를 밀어 올리”고 “긴 눈맞춤은 사라”졌다. 이제 그 높이는 “허공”을 향하고 있다. 바닥을 무시한 허공, 바닥을 짚지 않는 허공은 느림을 죄악시한다. 그리하여 ‘개미떼의 속도’를 무시한 질주는 정을 소멸시키고 관계의 끈마저 잘라버린다. 우연히 마주한 사물의 이동이나 환경을 접해 현대인의 속물적 속성이나 비애를 집어내는 시인은, 바닥이 없는 높이는 그저 허공일 뿐 그 허공에는 “양심”마저도 “창밖으로 던져”진다고 읊는다. 대상의 외면보다는 내면이 시의 중심소재가 된다. 시적 내면에는 삶의 의미를 포함해서 다양한 존재의 의미가 들어있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그중 가장 빈번하면서도 주요한 시적 소재가 된다. 인생의 문제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삶의 질서 혹은 체계도 딱히 이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시간의 흐름 속 질서와 윤리와 체제는 어느 정도 우리의 관습이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기에 삶의 지혜와 경륜도 시적 대상이 되곤 한다.
계절이 뒤섞였다
실물 보다 화사하게
박제된 웃음을 띠고 멈춰버린 조화들
지루한 기다림을 들고
마트 코너에서 불빛에 시들어간다
뿌리가 거세된 불임의 그녀들
먼지 낀 이파리에 상표를 매달고 있다
입술 한 번 적시지 못한 채
삶도 죽음도 아닌 건조한 날들
묶여있는 시간의 태엽을 풀 수는 없을까
날마다 탈출을 기대하는 꽃들
이곳을 벗어나 식탁이나 벽에서 활짝 피고 싶다
정교하고 섬세한 손끝에서 피어난 색색의 꽃들
꽃의 유전자 한 점 들어있지 않아
철을 따라가는 낙화도 없다
할 수 있는 건
오직 가격표를 달고
제자리에서 늙어가는 것이다
―「마트에 핀 꽃」
움직임이 있는 것,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는 것,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며 생명 있는 것이다. 반면, 이것을 역으로 뒤집으면 죽음이 된다. 그렇다면, 살아있음을 가장한 물체는 과연 삶이 될 수 있을까. “박제된 웃음”과 “불빛”을 먹지만 한편 그 불빛에 의해 시들어가는 “뿌리가 거세된 불임”의 “조화”는 생명이 없음이 아닌가. 바닥도 아닌, 그렇다고 허공도 아닌 조화는 “제자리에서 늙어”간다. 그것은 “정교하고 섬세한 손끝에서 피어난” 것들, 제 스스로 피거나 지지 않는다. “철을 따라가는 낙화”는 바닥을 알기에 다시 허공을 향해 오를 줄도 안다. 그러나 ‘마트에 핀 꽃’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가격표를 달고/제자리에서 늙어가는 것이다.”
삶은 불안하다. 그 불안을 잊기 위하여 환상을 만들고 그 환상 속에서 불안을 잊고자 한다. 그러나 그 불안은 기실 잊힌 듯 보이는 것, 환상이 불안을 완전히 소멸시켰다기보다는 잠시 환상의 골에 갇혀있는 것이다. 환상은 영원한 도피처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요동치는 욕망을 다스려가면서 삶은 스스로 포기하고 다독이는 것뿐,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것이 삶이 아닌가.
그 자궁 속에 웅크려 잠든 적이 있다
밖을 피해 기어들어간 어둠의 품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일곱 살을 찾느라고 소란스러운 바깥 따윈 잊고
까마득히 먼 잠에 빠져들었다
벽장문이 열리고 쏟아지던 환한 빛,
안도감에 끌어 안겨 한나절이 무마되었다
시침을 떼고 있는 벽의 마음을 열면
버리지 못하고 감춰둔 것들이 쏟아진다
수시로 빛과 어둠이 들락거리는
나 역시 비밀스러운 벽장,
마음의 주머니마다 묵은 시간의 먼지가 쌓여있고
눈을 피해 밀어 넣은 것들
눅눅한 잠에 잠겨있다
갑작스런 비를 피해 뛰어든 밑동 굵은 느티나무,
가슴께 구멍이 뚫린 우묵한 벽장과 마주쳤다
얼마나 많은 목숨을 품고 있을까
묵묵히 내어준 빈자리가 고요하다
―「벽장의 시간」
바닥인 것들이 바닥을 벗어나면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때로 그것은 넓은 품이 된다. 바닥으로 남은 것과 다시 다른 삶으로 태어난 것들의 의미, 그것은 시인의 상상과 그 너머 환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바닥이 벽장이 되듯이 사물이 제 모습을 벗어나 문득, 불쑥, 불현듯 “품”이 되는 것은 제 본성을 고집하지 않고 또 다른 성질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하다. 어둠이지만 “환한 빛”이 되는 “비밀스러운 벽장”은 “묵묵히 내어준 빈자리” 혹은 “목숨을 품고” 있는 넓은 가슴, “비를 피해”주는 은신처다. 비록 “묵은 시간의 먼지가 쌓여 있”는 “눅눅한” 것이어도 “마음을 열”어 주었기에 가능하다. 이렇듯 바닥은, 생각하기에 따라 새로운 삶의 근원이나 안식처가 되고 죽음의 경계와 절망을 넘어선 새로운 의미가 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의미와 표현 사이에서 간접화될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를 자유로이 소통, 교감하는 시적 욕망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욕망이 시적 상상력을 차용하는 것이다.
내면의 울림이 없는 시에 탐닉, 시의 본성을 잃을까 하는 염려는 그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에 이르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책까지 강구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적 울림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시적 대상에 대한 피동적 관조가 아니라 능동적 지각으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일상의 친숙한 시적 대상이라 하더라도 사물에 대한 새로움을 발견해내는 시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양아 시인은 시적 대상을 예리하게 꿰뚫어본다. 시인의 시적 감각은 대상을 직관하되 대상 속에 숨은 아름다움과 존재의 근원을 파악해낸다. 시에서 차용해오는 자연에서 그 자체의 순환이나 아름다움만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생의 길을 모색, 생의 에너지를 충전하거나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표현해낸다. 유한한 생명에 반한 존재의 영원성을 지향하며 생성하고 회전하는 삶의 원리를 터득하기에 그가 읽는 ‘바닥’의 원리는 그 자체를 넘어 존재의 영원성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회전하는 삶의 원리를 위해 끝없이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 대상을 행해 서슴없이 다가서는 시인은 대상 속으로 스며들어 그것과 기꺼이 합일을 이룬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그것 너머의 세목의 의미를 알아챈다. 생을 반추하며 존재의 근원과 아름다움을 관조할 줄 아는 시인은 탄탄한 시력과 함께 현실너머의 존재가치를 다시 현실로 가져온다. 바닥이 바닥을 넘어 새로운 삶이 되거나 또 다른 가치로 전환되는 경이로움을 느끼는 과정은 자못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최연수 시인 (본명 최선옥)
2015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및 제10회『시산맥 』으로 등단.
이화여대 졸업
평론집『이 시인을 조명한다』
시집『누에, 섶을 뜨겁게 껴안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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