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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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파지/천양희

에세이향기 2023. 1. 4. 16:20

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詩)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증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을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면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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