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詩)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증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을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면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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