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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잔 소 리/안병태

에세이향기 2023. 2. 4. 17:11

잔   소   리

 

안병태

 

   아내가 야간에 외출을 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구태여 마당으로 쫓겨나 담배를 피울 필요도 없고, 뉴스냐 연속극이냐 따위로 가위 바위 보를 할 일도 없고, 아무 곳에서나 머리를 빗어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내가 가끔 외박을 한다는 것은 더욱 환영할 만한 일이다. 친구들과 노닥거리다가 새벽에 들어간들 잔소리하는 이가 없어 좋다. 대보름이나 백중 같은 날 갓바위부처 앞에서의 철야기도는 왜 하룻밤만 하고 치우는지 모를 일이다. 어차피 소원을 빌러 간 걸음, 여러 밤을 지새우면 부처님께서도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특별히 눈여겨봐 주실 것을…. 다행히 막내 입시 문제가 아직 남아 있으니 그때까지는 몇 번 더 외박을 할 것이다. 이미 익숙해진 철야불공, 그 애의 입시가 끝나더라도 꾸준히 계속했으면 한다. 나의 승진이나 봉급 인상, 그 밖에도 집안 대소사에 걸쳐 두루 찾아보면 기도할 제목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아내가 아이들을 몽땅 거느리고 처녀 때 살던 옛집을 방문하러 간다는 것은 속으로 만세를 부르고 만국기를 달 일이다. 8∙15에 버금가는 해방감이 있다. 이왕 가는 친정 길, 애들 방학하는 날 갔다가 개학 전날 돌아오면 될 일을 꼬물꼬물 늑장을 부리다가 이제야 간 것이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름이 어디냐.

  이부자리는 그가 가던 날 깔아놓은 그대로 아침에 빠져 나온 터널 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가면 그만이요, 손발이야 씻고 싶으면 씻고, 말고 싶으면 말고 무슨 대수랴. 머리맡에다 흡연 장비와 커피 세트, 책 몇 권과 필기도구 일습을 한 살림 차려놓으니 화장실 다녀오는 일과(이 문제도 그가 시집올 때 갖고 온 놋요강을 찾아내 간편하게 해결할 작정이었으나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 요강 주인이 엿과 바꿔먹은 모양) 애국가 끝나면  TV 끄러 일어날 일(이 문제도 다음 방학이 오기 전에 리모트 콘트롤 되는 신형으로 교체할 예정이다) 외에는 내 마음대로 뒹굴 수 있어 느긋하고 오붓하다. 자유와 해방이 이렇게나 좋은 것이길래 선열들은 그렇게 피눈물들을 흘렸나 보다.

  그녀는 잔소리를 하기 위해 태어난 모양이다. 꿈에서도 잔소리를 하겠지만 잠들기 전엔 무슨 트집을 잡더라도 줄기차게 잔소리를 퍼붓는다. 어디서 그런 다양한 재료들을 장만해 내는지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항상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다가 기회다 싶으면 사정없이 달려들어 잔소리를 퍼붓는다. 이젠 나도 잔소리 듣는데 이골이 나서 그녀의 잔소리에 대한 철학과 이론을 거의 파악하기에 이르렀고, 잔소리의 원인 발생 예방과 현장 대피 요령 또한 거의 통달하기에 이르렀으나 워낙 그녀의 잔소리 솜씨가 일취월장하여 미처 따라잡지 못한 채 하염없이 당하고만 있다.

  하기로 들면 나라고 잔소리할 재료가 없을까. 25년이 넘도록 주방장 자리를 맡겨두었건만  아직껏 음식 간 하나를 제대로 못 맞추는 한심한 요리솜씨, 월급봉투를 300번이나 타다 바쳤건만 그 역시 차․대변을 깔끔하게 못 맞춰 다달이 펑크를 내놓고 쩔쩔매는 어설픈 가계부 경리 솜씨…. 식당이나 회사라면 쫓겨나도 벌써 여러 번 쫓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소재로 잔소리를 해본답시고 섣불리 덤볐다간 되로 주고 섬으로 돌려받을 것이다.  다른 것도 거의 다 그렇지만 잔소리에 관한 한 나는 그의 적수가 아니다. 그저 잔소리를 듣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잠자코 있는 것이 편하다.

  그의 시어머니도 타고난 잔소리꾼이었다. 그렇게나 잔소리를 퍼부어도 내 학업성적 향상에 별 효험을 못 보시자 기가 막혔던지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일찌감치 잔소리 없는 나라로 가시고 말았다. 잔소리에서 해방되고 나니 그렇게나 홀가분하더니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오히려 엄마의 그 잔소리가 듣고 싶어 눈물이 날 때가 있다.

  얼굴도 모르는 시어머니의 잔소리 가업을 잇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아내는 훗날 그의 시어머니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잔소리에도 격이 있나 보다. 엄마의 잔소리가 에밀레 종소리였다면  아내의 그것은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소나기 소리라고나 할까.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학업을 중단하고 상업에 뛰어들어 많은 돈을 긁어모은 허생은 잔소리 순종형이요, 잔소리를 퍼붓다 지쳐 물동이를 뒤집어씌우니 ‘그렇지, 천둥 끝에 폭우렸다. 그 시원하다.’ 하며 학업을 계속한 끝에 장원급제한 아무개는 잔소리 무시형이다. 이왕 잔소리를 하려거든 허생․아무개․소크라테스의 부인 정도는 되어야 잔소리로 내조한 보람을 찾으련만, 우이독경에다 마이동풍형인 나 같은 부류는 잔소리하는 사람 입만 아팠지 본전도 못 건진다.

  잔소리는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왕의 말이 곧 법인 절대군주 시대에서조차 잔소리를 업으로 삼는 벼슬아치들을 양성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 대간의 언관들은 왕에게 열심히 잔소리를 바쳐야 했다. 게으름을 피워 일정기간 잔소리를 걸렀다간 목이 떨어지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니,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잔소리를 해야 했던 것이다.

  잔소리를 가장 많이 겪은 왕은 영조였으리라. 재위 52년 동안 신하들의 잔소리․고자질에 넋을 다 빼앗기고 나중엔 아들마저 뒤주에 가둬 죽인 그가 임종 때 근신에게 조용히 들려준 말이 "이제야 잔소리에서 벗어나나 보오!"였다던가.

  내시부사 金處善은 왕에게 꼬장꼬장 잔소리를 바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신하들의 간언을 잘 새겨듣는 것이 임금의 주요 덕목이었건만 연산군은 잔소리가 듣기 싫어 숫제 사간원 자체를 폐지해 버린 어처구니없는 왕이었다. 처선의 잔소리가 얼마나 심했던지 처선을 죽이고도 분이 덜 풀린 연산이 전국에다 아예 '處'字 사용을 금하는 바람에 한때나마 '處容'을 '豊頭'로 개명한 일까지 있었다. 목숨을 던져 왕에게 옳은 길을 가도록 꾸짖은 처선, 이 시대에도 그런 신하가 더러 있다면 세상이 이토록 시끄럽지는 않을 것을….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잔소리를 하는 유형도 가지각색이었다. 돈수백배하고 엎드려  정중히 예의를 갖추는 표준형,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털어놓는 비분강개형, 도끼를 메고 들어가 죽음을 무릅쓰고 왕과 담판하는 사생결단형…. 했던 소리 또 하고, 했던 소리 또 우려먹는 우리집 잔소리꾼은 금이 간 레코드형이다.

  '잔소리하는 여인과 궁궐에 사는 것보다 광야에 홀로 서있는 것이 낫다.'

  '여인의 잔소리는 바람을 제어하는 것 보다 어렵다.‘ 솔로몬의 부인도 잔소리가 제법 심했던 모양이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그 언관이 돌아온다. 싱크대가 넘치도록 수북이 쌓인 설거지 감을 보고 나면 기가 막힐 것이다. 장롱 속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간 의복들을 곶감 빼어 먹듯 야금야금 끄집어내다 모조리 화장실 구석으로 옮겨다 쌓아놓은 것을 보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 볶음밥을 만들다가 새까맣게 태워먹은 튀김냄비는 아예 마당으로 날아갈 것이고…. 그 날은 서천 강변마을이 조금 시끄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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