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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압곡사 가는 길 / 김양희

에세이향기 2023. 2. 4. 07:03
압곡사 가는 길 / 김양희
 
 압곡사에 닿으러 가는 길. 이 길은 길과 잇닿아 자리한 절집을 닮았다. 널찍하기보다 조붓하고 웅장하기보다 아담하며

매끈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거친 시멘트로 바퀴가 지나갈 만큼만 바닥을 다졌다. 산이 주는 그대로 나무를 비끼고 구불
거리며 오르막내리막으로 닫는 길은 딱 압곡사를 위하여 닦아놓은 산속의 마침맞은 트임이다. 간혹 마주 오는 차를 만
나면 여지없이 그 자리에 갇히고 마는 길. 설혹 마주치게 된다면 여유가 되는 길목 그쯤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올
라간다.
 
압곡사는 나무오리가 날아가 앉은 곳에 지었다는 설이 내려온다. 의상대사는 나무오리 드론을 띄워 산세를 살피고 풍광

좋은 자리에 아담한 절을 앉혔다. 절집 마당에서 봉우리와 능선이 물결치는 멈춤을 바라다보면 누구나 그곳에 터를 정
한 대사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게 될 것이다. 
 
절집은 길의 입구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 늦가을 감나무를 밝히는 까치밥 같기도 하다. 이 운치 있는 길을 제대로 헤아리려면 한 발 한 발 걸어야 한다. 차를 타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경치를 편히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절집 입구에 쉽사리 다다라

버리는 싱거움에 빠지지 않으려면 거친 숨소리 정도는 기꺼이 제공해야 한다. 오가는 길에서 이따금 산책 나온 산토끼도 
만나고 덤불 속에서 익은 산딸기에 매료되기도 하는 길. 소름 돋는 뱀의 혀를 만나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기도 하는 길. 어
쩌면 길이라기보다 압곡사와 사람들이 서로 통하는 마음 터널이기도 하다. 절집으로 처음 가는 사람에게는 과연 어떤 절정
에 다다르려고, 어떤 풍광을 보여주려고 이렇게 생생한 묘미를 펼칠까 하는 기대감에 설레고, 이미 가 본 사람에게는 그렇
지 압곡사라면 이 정도의 재치와 끼로 뭉친 매력적인 길을 마련해두어야지 한다. 
 
구불텅한 길에 늘어선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살아있는 감촉을 손바닥에 새기며 느긋하게 걸어간다. 길은 거친 바닥이다. 

그 바닥을 밟는 바닥들에게만 길이다. 흙냄새, 풀냄새도 맡고 산바람과 맞부딪치고 벌레들이 부스럭대는 숲의 작은 소리도 
들을 줄 아는 바닥들. 바닥은 바닥을 무조건 끌어안아 품는다. 그에 기대는 모든 것들을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소 
그것들의 자국으로 갈라지고 패일지언정 기꺼이 바닥에 밟히는 길이 되어준다. 자신은 무엇을 밟을 일 없어도 밟히는 것에 
이골이 난 것처럼 드러누워서.
 
가는 길에 생각을 하나씩 벗어 내리며 걷다보면 절집 막다른 계단 앞에서는 날개를 편 듯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려오며 다

시 그 생각들을 줍는다고 할지라도 이미 길에서 숲 바람에 씻긴 생각들은 한결 가볍고 상쾌해져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겪게 되는 길이 바로 오래전 그날부터 오늘까지 나무오리 드론이 일러주는 길이다. 절에서 바라보는 경치야 어디에 비할 
수 없는 아득함이며 고즈넉함이지만 걸어가는 과정의 거친 숨소리에는 그 아득한 경치가 들려줄 매혹적인 그림을 미리 새
기게 되는 것이다. 
 
길은 길에 잇대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설령 외길이라 하더라도 되짚어온다면 길은 다시 이어지며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압곡사 가는 길도 외길이다. 그러니 갔던 길을 되짚어 나와야 하고 내려오다 보면 가는 길에 보이지 않던 소소한
풍경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나무 뒤, 구부러진 길에 숨었다 나타나는 것처럼 들꽃이나 들풀, 열매, 돌멩이가 마
음을 반짝거리며 기다리고 있다. 모든 보이는 것은 바라보는 위치와 방향에 따라 다르다. 또 사물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
니라 마음으로도 보는 것이라서. 어떤 감정 상태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전혀 못 보고 말기도 하는 것이라서. 올
라갈 때와 내려올 때 마음 상태가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극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나'라는 집과 이 집에 연결된 내가 걸어가는 삶의 길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에게 오는 길은 압곡사로 가는 길과 

참 많이 닮았다. 내가 나에게 다다르기 위해 좁고 구불거리고 벼랑을 오르거나 내리막으로 치닫기도 한다. 그 길에서 비를
만나 흠뻑 젖기도 하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햇볕에 살갗이 부딪쳐 따갑기도 하고 눈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
기도 한다. 한편 내가 나에게 오는 길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도 있는 까닭에 아주 짧기도 하고 무척 길게 느끼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내 길에도 압곡사로 가는 길처럼 산딸기가 열리고 들꽃을 피우고 산토끼가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는 길인

가를 더듬어본다. 당연히 그런 생생하고 신선한 묘미와 우아한 재치, 끼로 뭉친 길이길 바란다. 나의 길에는 나무가 우거
져 있지만 밤새 내린 눈이 아침볕에 금세 녹아내리는 길이었으면 한다. 장대비가 내려도 깊은 물웅덩이가 없어서 오래 고
이지 않고 바람이 가는 길을 막지 않아서 숲 향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길이었으면. 또 나의 길은 내게도 즐거운 길이고 옆
길을 걸어가는 타인에게도 기뻐할 수 있는 길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내 길이 닿는 '나'란 집이 넉넉하고 포근하고 거슬리
지 않아야 하겠다. 집이 달라지면 길도 달라질 것이니 누구라도 마음을 열고 교류할 수 있는 집이라면 더욱 바랄 게 없겠다.
 
길은 무엇이 드나드는 통로로 존재하지만, 길에 잇닿아 있는 집의 한 과정이다. 때론 길에서 나고 죽는 것들의 집이 되기

도 한다. 길과 집은 무척 친밀하고 맑은 관계로 돈독함을 유지하고 있다. 길이 성해지려면 길에 잇닿은 집이 융성해야 하
고 길이 쇠하는 건 길의 탓만이 아니라 결과인 집이 쇠하는 것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까닭이리라. 길과 집, 과정과 결과라
는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서 나의 자세를 다시 바로잡으며 압곡사를 향하여 홀가분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저만치 압곡사 돌계단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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