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적 생존기 / 문경희
각다분한 오늘을 언어의 춘추전국시대라 일컬어보랴. 자판기를 굴러나오는 캔음료처럼, 각양각색각미의 신어가 뚝딱뚝딱 창조된다. 귀로, 눈으로 채집되는 그것들은 막 잡아올린 생선처럼 내 안을 퍼덕거린다. 입보다는 SNS라는 소통의 창구에서 주로 애용되는 그들의 말맛은 새콤달콤쌉사레. 그것은 한때 청춘이었던 기성세대를 낡고 닳은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규정지어버리는, 돌도 거뜬하게 소화시킬 MZ세대들의 입맛에서 비롯되었을지니.
나는 아주 가끔 그것들을 씹고 뜯고 맛보지만 피와 살로 체화하지는 못한다. 그들과 나 사이의 아뜩한 불능의 거리는 야릇한 자괴감으로 채워지기도 하나니. 목에 걸린 가시 같은 그들, 불편유발자를 겨냥하여 유치하게 꿰맞춘 '아무말대잔치'라 구어박아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새뜻하고 기발한 착상에 혀를 내두르는 적도 드물지 않으니, 고작 신포도라는 비겁한 논리를 이불처럼 끌어덮은 채 구시렁거리기나 하는 주제랄까.
젊음을 소장한, 세상의 주류들이 생성해내는 언어는 입안에서 매양 달그락거린다. 잘근잘근 씹어삼킬 수 없는 그것들 때문에 속이 더부룩한 날이 많다. 설사 그 이질감이 마뜩치않을지라도,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가 불통 내지는 난통의 단초가 되어버린 아이러니에 토를 달지는 않는다. 나 또는 나와 엇비슷한 부류들의 고충과 상관없이 카오스적 언어들은 나날이 확대 재생산될 것이므로.
나라마다 문턱을 낮추었고, 하늘길 물길을 동원하면 못 가는 곳이 없어진 지 오래다. 한 술 더 떠, 두 발이 아니라도 가고오는 방도가 생겼으니, 문명의 쾌거라. '이리 오너라' 손가락만 까딱거리면 사이버라는 기가막힌 세상이 넙죽 코앞으로 대령하는 마당 아니랴.
사이버가 어떤 곳인가. 선 없는 선이 인도하는 그곳에는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는, 광대무변이 멍석처럼 깔렸으렸다. 딸깍, 로그인되는 세상은 눈 코 입 없는 익명들이 혓바닥 없는 발설로 저마다의 필요를 흥정하느라 복닥복닥 분주할지니. 수많은 제후들이 할거하던 춘추전국만 못할까.
차마 눈맞추고는 뱉지 못할, 지나치게 보들보들하거나 우락부락한 언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구사된다. 하여, 활자라는 언어를 매개로 피를 나눈 형제가 되었다가, 박터지게 치고받으며 철천지한을 쌓기도 하는 요지경이 무시로 상영된다 한들 그러려니. 가식의 너울을 덮어쓴 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로 둔갑을 할 수도 있고, 엉덩이만 무거우면 잡학다식의 거드름마저 가능케 만들어주는 곳. 만나지 않아도 말을 섞고 생각을 나누는 바, '우리는 하나'하고 케케묵은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세상은 이미 한통속일 수밖에 없으려니.
본디 언어란 내가 너에게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하여, 사람이 행차하는 곳이라면 말의 초롱부터 앞장세워야 한다. 생판타지에서도 핵심 단어 몇만 달달 외우고 있으면 소통이 가능하다던 어느 여행자의 경험담을 고증하듯, 밑도 끝도 잘라먹은 말의 뼈다귀들이 얼기설기, 본때 없고 예의도 없다. 꿰는 자는 꿰고, 밑천이 시원찮은 자들은 불통으로 건너 뛰어도 괘념치 않겠다는 그네들의 배부른 수작이 마뜩찮기는 하나···. 문법이나 어법의 논리를 사그리 무시한, 죽도 밥도 아닌 언어들이 횡행한들 막아설 방도가 없을 뿐이라. 그것을 두고 이른바 대세라고 하는 것이렸다.
까치발로 대세를 탐할 것인가, 말귀 어둔한 노인에로 주저앉을 것인가. 허옇게 백태 낀 혀로 시답잖은 화두나 캐고 앉은 내가 못마땅한지, 내 안에서 마냥 찌그러져 있던, 눈곱만큼 남은 혈기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는 것이다. 고구마 백 개를 먹을 듯, 턱턱 말문이 막히는 일이 다반사라. 내 요놈의 것들을 오달지게 간파해보리라며 지피지기까지 끌어다붙였겠다. 자청해서 거칠고 험악한 말의 호구虎口로 들어가는 일에 이만한 분기면 면치레는 될 테다.
슬슬 그들을 간보자면, 치느님, 이생망, 소확행 정도는 애교다. 꾸안꾸, 워라밸, 갑분싸, 솔까말, 넘사벽, 본케, 부케, 역시 가뿐하게 넘어선다. 그러나 뇌피셜, 낫닝겐, 고스팅, 갑통알,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머리부터 지끈거린다. 할말하않, 많관부처럼 친절한 단서를 주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뷁, #G, H워얼v 같은 난삽한 조합에서는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 ㄱㅇㄷ이나 ㅈㅂㅈㅇ와 같은 초성체 또한 해독을 요하는 난수표와 다를 바 없다. 뿐인가. 롬곡옾높, 괄도네넴띤, 부모 죽인 원수 대하듯 엎어치고 매치고 글로 주리난장을 틀어놓은 고약한 뱃심 앞에서는 무작정 난감해진다. 그들과 통通하려면 미적분처럼 언어를 풀어내야 한다는 결론이다. 광화문 광장의 대왕, 세종께서 대노할 행태 아니랴.
보기에 따라 다분히 실용적인 화법처럼 보이나 사람을 골라 사랑하는 묘한 악취미가 그 속에 심어져 있으려니. 나처럼, 그들만의 리그에서 배제당한 자에게는 복잡다단 이해불가, 난관의 연속일 따름이라. 파지처럼 꼬깃꼬깃 자존심이 구겨지고, 최대한 긍정을 섞었던 첫 마음까지 느적느적 꽁무니를 뺀다.
하긴, 세상이 혼동의 도가니인데, 무시로 일어나는 언어의 교잡쯤이야. 말과 글의 품격을 운운하고 정도를 들먹이면 대책 없는 '꼰대라떼'의 낙인을 피치 못할지니. 시대를 앞장서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발맛추기는 되는 척, 나도 적당히 섞어 비벼나보랴 싶어지는데.
햐, 비비는 일도 만만찮다.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과육처럼 상큼한 창의력이 관건이건만 후줄근한 주머니 속에는 세월의 먼지만 풀썩거린다. 이도저도 그만 멋쩍어진다. 고지식으로 미장이 된 형편에 뛰었다 날았다 고꾸라졌다를 거듭하는 청춘의 보폭을 따라잡으랴. 방정맞게 울리는 '카톡'처럼 누군가, 어디선가 핏발선 나를 각성시키는 저 두 글자, 깨몽.
형광등처럼 뒤늦게 번쩍이는, 나는 그냥 나로 살자. 발빠른 세상의 아웃사이더로 스스로를 자복할지니. 중심을 포기한 대가로 무거운 안달복달은 그만 내려놓자.
그러할지라도, 영원한 도태만은 면해야 하므로 '눈에는 눈', 허락도 없이 함무라비법전까지 소환해보는데, 카오스에는 카오스 아니랴. 준말, 본딧말, 예사말, 높임말, 우리말, 물 건너온 말···, 섞이고 섞인 언어의 잡탕밥에 수저질을 해가며 물렁물렁한 카오스적 방패로나마 살벌한 말의 대전大戰에서 살아남을 수밖에.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압곡사 가는 길 / 김양희 (1) | 2023.02.04 |
---|---|
문병 유감 /안병태 (1) | 2023.02.04 |
가시를 바르다 / 설성제 (1) | 2023.01.28 |
막사발 / 류영택 (1) | 2023.01.27 |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0) | 2023.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