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딴지
신성애
봄날의 수목원은 싱그러움으로 가득찼다. 창포와 부들, 갈대 잎들이 물웅덩이에서 춤을 추고, 궁궁이와 구릿대가 어깨걸이 하듯 너울댄다. 풀숲사이를 비집고 나온 바람 한줄기 조심스레 뚱딴지를 흔들고 있다. 넓은 공원 구석구석 당당히 제 이름을 단 풀과 꽃들이 수런거린다. 사금파리 같은 빛줄기에 화들짝 피어난 꽃들 너머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이 몰려간다.
이팝나무 둥치를 잡고 빙그르르 꼬리잡기를 하던 아이들이 허기가 지는지 돗자리를 깔고 점심상을 펼친다. 햄과 계란말이 오징어무침,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재잘거리며 먹고 있는 아이를 보니 염치도 없이 배꼽시계가 꼬르르 신호를 보내고 있다. 식당을 찾아 밖으로 나가기에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시간도 아낄겸 배달음식을 시켜먹자며 누군가 운을 떼자 너도 나도 동조의 눈빛을 보탠다. 제 때에 끼니를 떼우고 약도 챙겨야 한다고 일행 중 한 명이 안절부절못한다. 식당의 전화번호도 모르면서 굳이 밀가루 음식이냐며 딴죽을 걸어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114안내전화로 가장 가까운 식당에 득달같이 주문을 하고 배달할 장소를 일러준다.
눈 간데없이 가꾸어놓은 수목원에 배달음식이 가당키나 할까. 암만 생각해도 찜찜한 마음에 확인전화를 부탁해보지만 문제없을 거라며 들은 척도 안한다. 바다 한 가운데 쪽배에도 자장면을 배달하는데 무에 그리 걱정하느냐며 도리어 타박이다. 혹시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모두가 도시락을 싸온 사람들뿐 오가는 장사꾼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눈부신 햇살에 손차양으로 거닐던 젊은 연인만 초록빛 그늘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바야흐로 짙푸른 수목의 향연에 메마르던 가슴들이 흥건히 젖는다. 단단히 걸어두었던 시간의 빗장을 풀고서 아이처럼 벌써 마른침을 삼키고 있다.
한량없는 기다림에 지쳐 하는 독촉 전화를 장난으로 치부하는 걸까. 배달할 곳이 공원이냐고 되묻는지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심쩍어하는 상대방에게 느닷없이 원장이라며 불호령하듯 다그친다. 한술 더 떠 알지도 못하는 원장이름을 들먹거리며 대꾸할 새 없이 휴대폰 뚜껑을 닫아버린다.
"거짓말 하면 우야노. 그까짓 자장면 안 먹으면 그만이제."
명색이 미용실 원장인 나는 볼멘소리를 하고 만다.
"언제 수목원 원장이라 캤나. 그냥 원장이라 캤제."
시침을 뚝 떼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밉지 않은 넉살에 모두들 박장대소하지만 내 가슴은 조마조마 헛웃음만 나온다.
정문 초소에서 위치를 확인하는 전화가 오고도 한참이 지나 공원을 가로질러 오토바이가 달려온다. 방향을 찾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헤매고 다녔다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각자 한 그릇씩 받아들고 그늘에 앉아 먹을 채비를 서두른다.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퉁퉁 불은 면발이 자장소스를 부어도 비벼지지 않고 있다. 내심 반신반의하던 나도 배달이 되는 곳이구나! 안도의 숨을 쉬며 랩을 벗기려는데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찰나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선 그림자는 시야를 가리고 발등까지 덮치고 있다.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에 젓가락을 놓치고 만다.
완장을 찬 공익요원이 떡하니 버티고 서서 어이없어 하고 있다. “공공장소에 배달 음식이 웬 말이냐. 누가 원장이라고 했느냐”며 새파랗게 닦아세운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나는 뜯다만 그릇을 엉겁결에 내려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고개를 돌리고 만다. 아까까지 옆에서 놀던 유치원생들이 돌아갔기에 망정이지, 우사도 이런 우사가 없다.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에는 수목원으로 음식을 배달시킨 것보다는 속아서 안내까지 해준 게 더 분하다는 모습이 역력하다. 바람 한 점 없는 한낮의 수목원이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적막에 쌓였다. 세상이 무너져도 먹어야한다는 듯 묵묵히 젓가락질 하던 넉살장이가 한달음에 일어선다. 임기웅변이 좋은 뚱딴지에게 감히 나서서 말로 대적할 자 누구던가.
“우야꼬. 그라면 안 되는 가베. 시골서 처음 와가 뭘 알아야제. 전화로 물어 보잉 된다 캐서, 내가 그런 줄 알았제. 이왕 가져온 거, 말귀 몬 알아 묵는 우리도 앙이고. 오늘만 묵고 다음엔 안 그라꾸마. 우에 맨들었는지 디게 맛있데이. 한 입 묵어 볼란교?”
웃으면서 살살 구슬리더니 군만두 하나를 내밀었다. 어수룩하게 눙치는 데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지 씩씩거리며 돌아간다. 화르르 지는 꽃잎들이 나비처럼 하느작하느작 햇살아래 드러눕는다.
수목원이 생기고 나서 배달 시켜먹은 최초의 사람들이라는 우스갯말에 몇 가닥 건져먹은 면발은 색다른 맛으로 다가왔다. 생전 처음 땟국에 절은 얼굴로 밭둑에서 캐어내 맛보았던 뚱딴지 맛이 이런 것이었던가. 감자의 씹는 맛과 우엉의 풍미를 함께 지녀 아삭거리며 담백했지만 입안에 겉돌던 그 맛, 뚱딴지는 가녀린 줄기에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해바라기를 닮은 노란 꽃을 달았었다. 울퉁불퉁한 덩이뿌리는 무엇이 못마땅한지 시무룩한 표정에 목이 짧고 배가 부른 단지를 닮아있었던가. 공기에 노출 되면 금방 쭈글쭈글해지는 돼지감자라고도 불리지만 아무려면 어떠하랴. 사막의 녹지화에 기여 할 만큼 척박한 환경에도 적응력이 뛰어난 식물이라, 끈질긴 그 생명력이 약재의 반열에 ‘국우’ 라며 당당히 제 이름을 올렸다.
팍팍한 세상, 천편일률적인 매끈한 사람만 산다면 모래알처럼 서로를 결코 껴안을 수 없으리라.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엉뚱한 사람을 뚱딴지같다고 하지만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에 그리 대수이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기발함과 낯선 시선이 웅덩이에 고였던 생도 한바탕 소용돌이 쳐 흐르게 하는 것을…….
뚱. 딴. 지. 가만 가만 읊조리자 뱅글뱅글 돌던 뚱딴지 맛이 입안에 착 감긴다. 빈 그릇을 챙겨 들고 수목원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속에 뚱딴지가 되어 버린 한 여자가 터덜터덜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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