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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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칡/신성애

에세이향기 2023. 2. 26. 07:17

 

                                                                                                                                           신성애

 

 

  내리치는 곡괭이에도 칡넝쿨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쉽사리 잘리지 않는다.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줄기는 남자와 한바탕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안으로 단단하게 갈무리한 바람과 햇살이 얼마인데 호락호락 제자리를 내 줄 수 없다는 단호한 몸짓이런가. 남자는 점퍼까지 벗어던지고 곡괭이를 휘두르건만 잔뿌리에 걸려 옴짝달싹 않는다. 아무도 봐 주지 않은 산기슭 박토라도 한번 뿌리 내리면 평생을 사는 법인데 무슨 일이냐며 물기만 배어났다.  

 

 아지매는 언덕배기 웃뜸에 혼자 살고 있었다. 훤한 인물에 성격이 서글서글해 동네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어린 내가 놀러 가면 군입정거리를 꺼내주고 옛날이야기도 해주었다. 가끔씩 삯바느질하는 손길을 멈추고 나직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늘 안개비가 내린 듯 축축히 젖어 있었다

 

 집안이 들썩거리는 명절날이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아재가 마당가에 보였다. 경찰 옷을 차려입은 깡마른 체구에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꽉 다문 입매가 빗장 걸린 마음 같아 그 누구도 근방에는 얼씬도 않았다. 정지에서는 들릴 듯 말듯 두런거리는 말들이 오가고, 아지매는 허방 짚은 사람마냥 치맛자락을 움켜 쥔 채 뒤란을 서성거렸다. 꽃망울 같은 열네 살에 등 떠밀려 온 시집살이는 아이가 없어 늘 가시방석이었다.

 

 늦게야 객지에서 자식을 얻은 아재는 살림을 차렸고 대수롭지 않는 일에도 트집 잡기 일쑤였다. 친정에 돌아가라며 수시로 닦달하고 씨도 먹히지 않는 온갖 구실로 아지매를 윽박질렀다. 급기야 있지도 않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헤픈 여자로 몰아갔다. 해가 지고 달이 떠도 더 이상 아재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서리 맞은 칡덩굴처럼 무시로 부는 찬바람에 아지매는 시들시들 제 빛을 잃어갔다.

 

 칡뿌리를 캐려고 흙을 파내던 남자가 신통찮게 생겼다며 그대로 덮어버렸다. 맛도 없는 숫칡인 주제에 다른 나무와 엉켜 있어 볼품없다고 설레발이다. 울퉁불퉁 거친 껍질에 잔털이 많은 숫칡에 비해 암칡은 연하고 투실투실한 모양새에 가루와 즙이 많다고 한다. 한갓 칡뿌리가 선택의 경계선상에서 숫칡과 암칡으로 희비가 갈라지듯 사람도 음과 양으로 구분되어지면서 질긴 인연의 줄 당기기가 시작된 것이리라.

 

 잡목 사이를 넘나드는 햇살이 아직은 숲에 깃들지 못하는데 미련을 떨치지 못한 남자가 칡덩굴을 찾아 다시 산을 오르고 있다. 바싹 마른 나뭇잎이 고요를 흔들어 바짓가랑이에 지분거린다. 칡뿌리를 캐려고 파헤쳐진 구덩이에 짙은 그늘이 들어찼다. 아무렇게나 짓이겨져 풀어헤쳐진 덩굴줄기가 산발한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처연하다. 제 품에 들었던 인연을 내놓지 않으려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매달렸을까. 아우렁더우렁 서로를 휘감고 자라던 넝쿨이 뿌리가 잘린 채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터덜터덜 산기슭을 내려오며 칡을 캐고 있는 남자의 괭이질 소리를 듣는다. 썩은 나뭇가지 같은 아재라도 얼싸안고 돌아가면 종내는 어우러져 살아갈 줄 알았다. 훠이훠이 하늘을 오르다 결국에 원하지 않아도 곤두박질칠 수 있는 게 사람 사는 일인 것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 옛날 허기진 사람의 주린 배를 채우던 실팍한 칡뿌리가 이제는 공해에 찌든 몸을 돌보려 다시 각광받고 있다. 제 한 몸 살신성인하여 정화될 수 있다면 무에 그리 아까울까마는 깡그리 뿌리를 패가는 행태가 칡은 못내 서운하다. 서걱거리는 부엽토 틈새로 새싹들이 곁눈질하며 흘끔거린다. 맛보기로 본 바깥세상은 눈부시게 경이로워도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피부로 느꼈던 걸까. 게슴츠레 뜬 눈을 서둘러 감고 있다.

 

 미끈하게 잘 빠진 팔등신 같은 칡뿌리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듯 남자의 손에 들려 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쌉싸레한 단내가 나는 암 칡뿌리는 매력을 감추고 있는 여인과 흡사하다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숲의 불청객이라며 달가워하지 않아도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산을 지키는 초목의 정령이 되고 싶었을까. 쭉 빠진 두 개의 다리, 오동통한 엉덩이 모습이 땅속에서 건져 올린 미인의 몸매라 할 만하다. 칡의 끈질긴 생명력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이되고 있음인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남자가 구르듯 산을 뛰어 내려간다.

 

 사람은 더우면 그늘 속으로 숨지만 덩굴은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맨땅이든 비탈이든 햇빛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 않고 뿌리내리는 칡덩굴은 혼자 일어 설 수 없기에 하늘로 뻗어 오르려는 욕망이 그 무엇보다 강하다. 조금씩 가까운 물체를 잡고 걸음마 떼듯 일어서서 점점 높은 곳으로 발돋움하다 마침내 큰 나무를 감싸 안고 무동타듯 올라선다.

 

 한세상 살아가는 일이 사람과 칡에 무에 그리 다르랴. 넓은 평지도 흙탕길도 가파른 산길도 알게 모르게 초목이 되어 준 이들이 있어 땅에 구르지 않고 이만큼이라도 살아온 것을……. 줄기를 뻗어야 지탱할 수 있는 게 칡의 운명이라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야 하는 게 사람의 몫이 아닐까. 한여름 기세 좋게 뻗어가던 칡도 찬 서리가 내리면 움츠러들기 마련이고 홍자색 꽃으로 붉은 맘 내보이는 것도 뙤약볕 아래 잠깐이다. 칡 줄기는 그대로 있으면 산천에 거름으로 사라지지만 상처가 나고 짓이겨지면 가닥가닥 청올치가 되어 새롭게 태어난다. 제 있었던 자리 어디인지 까마득해도 인연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렴 어떠할까. 아지매는 장터에서 만나면 여전히 안부를 묻고 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내 두터운 생각의 더께도 세월의 바람에 벗겨내면 속살 드러난 청올치처럼 섬섬옥수 고운 손에서 옷감 한 필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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