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방
심선경
퓨즈가 나간 방은 삽시간에 어두운 숲이 된다. 고사목 덩치처럼 벽 한쪽으로 길게 누운 소파에 얼른 올라앉아 고개를 조아리는 내 모습은 수풀 더미 아래로 황급히 몸을 숨긴 채 웅크린 작은 산짐승의 형상이랄까.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숲을 점령한 어둠에 항거하는 것은 푸르디푸른 잎새를 기억하는 단단한 그리움들뿐이다. 때로는 바람과 몸을 섞은 나무들 서넛, 그 흔적을 애써 잊으려는 듯 고개를 떨군다. 지난가을, 창밖에서 활활 불타던 단풍나무는 참다못해 그 열기를 몸 밖으로 마구 뿜어내었다. 하지만 사랑의 흔적을 아무도 죄라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가을 나무들이 잎새를 빨갛게, 혹은 샛노랗게 물들이는 것은 그리움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그들만의 위장술인지도 모른다.
낡은 퓨즈가 끊어져 버린 어두운 방에서는 바깥 창문에 부딪치는 작은 벌레들의 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린다. 골목길을 밝힌 황홀한 가로등 불빛의 맨홀 속으로 하루살이 떼들 일제히 빨려 들어간다. 빛의 유혹에 걸려들어 우린 그동안 얼마나 많이 헛발 짚으며 나뒹굴었던가. 눈부시고 화려한 수식어들에 눈이 멀어 하늘 높이 떠올려진 무지개를 좇아 다녔지만 빛의 길은 하염없이 멀고도 험했다. 넘어지고 깨어져 아물지 않은 생채기 위에 마구 내리쬐는 빛은 무척이나 따가웠고 오래도록 그 부위를 덧나게 했다. 빛은 그 눈부신 프리즘을 통해 아픈 상처를 드러나게 하고 초라한 뒷골목의 쓰레기 더미마저 속속들이 헤집어 놓지만, 어둠은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세상의 모든 물상을 생긴 그대로 품을 줄을 안다.
사각 도시락에 담긴 찬밥처럼 어둠 속에 갇혀 보는 일이 그리 생소하지는 않다. 어릴 적, 내게만 무심해 보였던 부모님을 시험해 보려고 스스로 헛간 속의 어둠을 찾아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해 동짓달 어느 아침, 어머니께 밀린 육성회비를 달라고 했다. 며칠만 더 기다리라는 상투적인 반응에 시큰둥해져서 입을 댓 발이나 내놓고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오빠는 벌써 육성회비를 받아 갔고 며칠 전에는 시험에 대비한다며 참고서 살 돈까지 받아 간 터다. 늦었으니 빨리 학교에 가라는 어머니와 육성회비 받기 전에는 절대로 학교에 갈 수 없다는 내 고집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엔 어머니가 부엌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 왔고 내게 당장이라도 퍼부을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고서야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담임선생님이 육성회비가 밀린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언제 낼 수 있냐고 약속 날짜를 다그칠 때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빈손으로 학교에 가는 날은 언제나 나는 거짓말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창피를 당하는 꼴을 어머니가 보았다면 매일 아침마다 '며칠만 더'라는 부도수표를 남발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저 아들만을 최고로 생각한다. 딸자식은 자식도 아닌가. 내가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않을 듯한 어머니 생각에 독이 오를 대로 올랐다. 어디 혼 좀 나 보시라지.
마당에 저녁 어스름이 길게 드러눕자 바깥 풍경은 몹시 부산스러웠다.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가 아무도 없었고 돌아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인 나를 찾아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이웃집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내 또래 아이들만 지나가면 붙잡아 세우고선 나를 못 봤느냐고 다그칠 듯 수소문하는데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버지는 학교 근처로 다시 가 보겠다며 페달을 밟을 때마다 녹이 슬어 숨이 컥컥 넘어갈 듯한 짐 자전거를 타고 황급히 집을 나가셨다.
평소엔 헛간 옆을 지나기조차 꺼려 했었는데 마땅히 숨을 곳을 찾지 못해 그곳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성긴 헛간 문틈 사이로 집 안 동정을 살피다가 이쯤 해서 슬그머니 나가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일이 너무 싱겁게 끝날 것 같아 밖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둠은 시나브로 빛의 영역을 침범했고 결국은 단 한 점의 공간도 남겨 두지 않은 채 헛간 구석까지 검은 휘장을 펼치며 덮쳐 왔다. 겨우내 부엌 아궁이를 뜨겁게 지펴 줄 참나무 장작더미 아래 동그랗게 몸을 움츠렸다. 황토 흙벽에 걸린 쇠스랑이 절 입구의 천왕문을 지날 때마다 나를 움찔 놀라게 했던 사대천왕의 삼지창으로 변해 금방이라도 나를 공격해 올 듯한 두려움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발을 조금만 움직여도 메케한 먼지가 몸을 푸석거리며 일어난다.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는 퇴비의 퀴퀴한 냄새 때문에 내 코가 썩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먹이 사냥을 위해 포획용 그물을 쳐 놓은 왕거미가 눈을 부라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군데군데 헛간 바닥에 흩어진 쥐똥들 때문에 아무 일 없었던 등짝이 갑자기 스멀스멀하다. 이야기로만 듣던 달걀귀신, 처녀귀신이 홀연히 나타나 내 혼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자꾸만 몸이 굳어지고 으스스 떨리기조차 한다.
옹이가 박힌 문틈 사이로 조심스레 바깥을 살펴본다. 자정이 가깝도록 가출한 아이를 찾지 못한 어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다 마당에서 쓰러졌고 아버지는 넋을 반쯤 놓은 어머니를 부축하여 방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무시무시한 헛간에서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 혼찌검이 날 걸 생각하니 그럴 수조차 없다. 주린 배는 바깥 사정 같은 건 아랑곳 않고 염치도 없이 '꼬르륵 꼬르륵' 소리를 낸다. 헛간 한쪽에 쌓아 둔 마른 솔가지를 꺾어 씹으며 긴 밤을 꼬박 지새울 판인데 마당에 풀어 둔 강아지가 인기척을 듣고 헛간 앞에 와서 짖어 댄다. 개 짖는 소리에 밖을 살펴보러 나온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헛간을 탈출했다. 이젠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의외였다. 꽁꽁 얼어 사시나무 떨 듯하는 말썽꾸러기 딸년을 아무 말없이 꼬옥 안고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하지만 이튿날 역시도 어머니는 내게 줄 육성회비 대신 '며칠만 더'라는 기한부 어음을 귓전에 던져 두고 밭일을 나갔다. 헛간에서 어둠의 정령들과 목숨 걸고 투쟁하여 겨우 살아났건만 그것은 아무런 보람도 없이 무위로 끝나 버렸다.
헛간에서 만났던 그 어둠은 두려움이라는 명사에 불과하였지만 불혹을 넘긴 지금은 사뭇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비 오는 날, 재즈의 선율이 묵직하게 흐르는 선창가 다방에서 찻잔에 담겨 온 뜨거운 원두커피의 빛깔처럼 요즘엔 어둠이 편안해졌다. 어릴 적엔 한없이 작아져 버린 내가 어둠의 찻잔 속으로 풍덩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이제 뜨거운 커피 속에 빠져든 어둠을 천천히 마시며 세상을 음미할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어둠은 생명 있는 것들의 숨소리를 듣고, 생명 있는 것들은 어둠의 숨소리를 듣는다. 누군가는 자신을 키운 것의 팔 할(八割)이 바람이었다 하나 내게는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 주었다. 어쩌면 우린 가장 고독하고 아플 때라야 내 속에서 울리는 생의 숨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 끊어진 퓨즈를 갈아 끼우지 못했다. 숲 속 같은 어두운 방에서 잠들면 지금도 초록색의 꿈을 꾼다. 고단한 삶의 베틀에 잉아를 걸어 올려 여문 꿈을 직조한 어둠이 무섬증을 앓는 조그만 짐승 하나를 슬그머니 끌어다 덮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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