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곳 이 절터다.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 같이 산다.’는 명시 한 구절을 곱씹으며 오늘도 길을 나선다. 물길이 비단결같이 곱다는 청도 금천(錦川)의 장연사지를 찾았다. 온화한 부처의 미소가 그리웠을까. 개망초 무리들의 탑돌이가 한창인 절터에는 소녀의 젖꼭지 같은 감또개가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넉넉했던 절터는 천맥으로 내주고 한 뼘 땅에 몸을 부비고 있는 쌍탑의 처지가 딱했다. 금당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 때문일까. 두 탑은 멀리 흘러가는 동창천만 무심히 바라볼 뿐 말이 없다. 태고를 향해 눈물짓는 망부석 같기도 하여 탑돌이 하는 내 마음이 짠해진다.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올린 육화산의 산정기가 흘러내려 살포시 품은 장연사지는 모든 게 수수깨끼다. 빈대가 많아 불태웠다는 구전 외에는 절의 규모도, 창건과 폐망도, 심지어 절의 이름까지 어느 문헌에도 언급이 없다. 절에서 씻은 쌀뜨물이 삼십 리나 흘렀다는 전설과 쌍탑의 구조를 읽어 통일 신라 시대의 대가람으로 추정할 뿐이다. 절 이름 역시 장연리라는 동네 이름을 따서 장연사지라 불린다. 절집은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제 자리를 잃고 나뒹구는 많은 석물에서 신라인의 호방했던 선문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곳의 백미는 당연 쌍탑이다.
보물 제677호로 지정된 두개의 탑 중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 동탑이다. 높이 4.6ⅿ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한 기단부와 탑신, 거기에다 살짝 치켜 올린 듯이 보이는 귀마루의 멋이 단출한 느낌을 준다. 근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는 과정에서 1층 몸돌 윗면에서 목제금칠사리함이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서탑 역시 동탑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만 키가 4.84m로 조금 크다. 일찍이 허물어져 개천가에 버려져 있던 것을 1980년에 수습하여 복원했다. 몸돌과 지붕돌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있고, 하층기단은 대부분 보충 석재로 이루어져 어긋난 색감이 아쉽다. 주름진 인생의 무늬인 듯 균열이 간 석탑 곳곳에는 지난날의 아픔을 말해주는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다.
담장 미인으로 비유되는 이 두 탑은 불국사의 석가탑을 빼닮았다. 간편하면서도 디테일한 선의 묘미,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균형미는 담백하면서도 세련된 맛을 준다. 신라인의 자부심인 다보탑에 비해 석가탑을 빚는 것이 훨씬 더 고난도의 기교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이곳 쌍탑의 가치를 다시 읽는다. 절터는 눈이 아닌 가슴으로 읽는다고 하지만 무성한 과목 때문에 금당 터조차 가늠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머뭇머뭇 절터를 빠져 나오는데 언덕배기 과수원에서 노부부가 매실을 수확하고 있었다. 인사를 건넸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천둥 같았다.
“불 탄 절을 찾아 오셨군요. 탑만 보고 가는 건 절반만 보고 가는 것이외다. 절터에서 나온 석물이 온 골짝에 흩어져 있어서……. 말하자면 이곳은 지붕 없는 박물관인 셈이죠.”
그랬다. 골짝은 한마디로 노천 박물관이었다. 영감님이 일러준 대로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첫 조우는 개울건너 감나무 밭 속에 몸을 숨긴 당간지주다. 반신을 잃고 돌무지로 변해가는 모습이 처연했다. 한때는 절의 상징으로 깃발을 높이 내걸고 구름 같은 신도를 맞기도 했으리라. 이젠 한 농사꾼의 애물이 되어 간신히 숨만 쉬고 있다. 그래도 가람배치를 가늠케 하는 소중한 역사의 흔적이 아닌가. 비록 차가운 돌이지만 부러진 상처를 쓰다듬자 세월의 파장이 찌르르 가슴으로 전해진다.
동네 앞으로 몇 발짝 옮기자 어느 문중 제실이 대문을 활딱 열고 있다. 마당에 들자 담 밑에 돌기둥 하나가 장승처럼 서있다. 눈에 익어 살피니 잘려나간 당간지주의 반신이 아닌가. 대문간에는 커다란 석조가 물을 담뿍 담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건물 기단 위에도 석등을 잃은 팔각 받침대가 입을 쩍 벌리고 떠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계단식 댓돌 또한 폐사지 냄새가 난다, 부처님의 통 큰 자비일까. 불교와 유교의 공존이 이색적이다. 한때 유학자들이 거품을 물고 비판해온 것이 불교가 아니던가. 어쩌면 패망한 이 절 역시 억불 숭유를 외치던 인간 빈대가 불태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했다.
골목 안 어느 민가의 정원에 모셔진 불두를 잃은 석불의 모습이 참으로 민망하다. 멀리 강 건너 폐교에 하반신을 잃고 유기된 미륵불과 장대석도 제자리가 아니다. 인근 마을 초입에는 장승으로 둔갑한 배례석도 있다. 한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지만 안상과 연화무늬가 뚜렷한 이 배례석은 불과 10여 년 전 홍수 때 개울에서 건져 올렸다고 한다. 풍요의 상징, 은행나무랑 어우러져 민초들과 고락을 함께하고 있으니 본디 품었던 불심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불편한 내 심기를 다독여 본다.
다시 절터로 돌아와 마음 자락 풀어놓고 탑 곁에 앉는다. 제자리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신라의 흔적들을 되짚어본다. 어쩌면 그토록 쓰라리고 아픈 우리네 역사를 닮았을까. 가슴이 아리다.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은 것이 폐사지다. 텅 빈 충만함이라고나 해둘까. 비워냄이 곧 채워짐이라는 역설의 논리를 절터에서 배운다. 흙 한줌, 무너지고 깨진 채 널브러져 용도를 어림할 수 없는 돌조각들, 나뒹구는 기왓장 한 조각에도 그 나름의 시간이 새겨져있고 흥망성쇠의 애환이 오롯이 스며있다. 그것이 문화재를 함부로 옮기거나 훼손해서 안 되는 이유가 아닐까.
절터는 말이 없다. 북풍처럼 쓸쓸해도, 제 모양을 잃고 온전한 것 하나 없어도 나는 굳이 절터를 찾는다. 절에는 3가지 보물이 존재한다. 부처, 가르침, 스님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가르침의 보물을 쫓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처가 있고, 중이 있어야 절이랴. 염불로 미혹된 마음만 깨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절이니라.” 내가 다니는 절의 주지스님이 하신 말씀을 곱씹어본다. 폐사지가 남긴 흔적을 쫓아 마음속에 부처님을 새기고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읽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불심이요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폐사지란 복원보다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더욱 역사적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전설 속 빈대 절터, 하루 빨리 흩어진 역사의 흔적들을 절터에 모셔서 만인의 사적지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천년을 외롭게 버텨온 석탑에 대한 위무가 아닐까.
노을이 산정에 걸린다. 청정한 하루를 탁발하고자 불국토를 누빈 오늘, 이 순간만은 부처가 되어도 좋으리. 환청일까. 휘적휘적 언덕을 내려오는 속물의 정수리에 정정한 독경 소리 한줄금 빗물 되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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